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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수대] 임화 (林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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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해방 전후 문단 내의 미남 3걸(傑)을 꼽아보았던 호사가가 있다.

훤칠한 키에 호남아 형의 시인 김남천(金南天), 당대 장안의 명기(名妓)들을 몸살나게 했던 시인 백석(白石)과 함께 또 한 명의 미남은 임화(林和.1908~1953)다.

그는 폐병환자 형의 천재다. 여름이면 즐겨 입었던 모시한복 차림의 갸름한 얼굴에 걸친 뿔테안경의 이미지…. 그런 임화의 근현대 문학사적 위상은 '격랑 속의 풍운아 혁명시인' 이다.

임화는 조선의 랭보다. 10대 시절에 불멸의 시 작품을 남긴 랭보처럼 그 역시 나이 스물에 문명(文名)이 장안에 뜨르르했다. 전국적 조직을 가진 카프(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의 중앙위원도 그런 명성 때문이다. 카프 서기장은 24세에 맡았고 대표작 '네거리의 순이' 도 그 무렵에 발표했다.

최근 『20세기 예술의 세계』(지식산업사)를 펴낸 박용구 선생이 70년 전 그 시절 회고담을 털어놓아 눈길을 끌었다.

평양고보생 박용구가 잡지 『조선지광』에 발표된 서정적 선동시 '네거리의 순이' 를 읽고 가슴이 마구 쿵쾅거렸다는 얘기다. 조선의 젊은이를 열광시켰던 그는 영화배우로도 활동한 못말리는 재사(才士)였다.

"시인.배우.비평가로서 일류였다는 사실이야말로 임화를 규정하는 말이다" . 주저없이 이렇게 밝힌 사람은 국문학자 김윤식 교수다. 명저(名著)인 『임화 연구』(민음사, 1989)를 펴낸 그의 말이니 그대로 믿어도 좋을 듯싶다.

근현대 비평사에서 아직까지도 뛰어넘은 이가 없다는 평론집 『문학의 논리』를 펴낸 임화는 '근현대의 르네상스인' 인 셈이지만 이 재사의 말로를 우리는 익히 안다.

해방 후 조선문학가동맹을 창건했던 그는 단짝이었던 작곡가 김순남과 함께 월북한 뒤 박헌영과 엮여 53년 간첩죄로 처형당했다. 했더니 지난 주 임화가 남로당 직계 이강국과 함께 미 방첩대 요원이었다는 국사편찬위원회의 발표(본지 9월 5일자 31면)가 있었다. 이 자료를 어찌 해석해야 할까.

북쪽이 남로당 제거를 위해 만든 간첩죄가 미국 자료에 의해 비로소 밝혀진 것일까? 아니면 진정한 혁명이념과 도그마 사이에서 방황하던 임화가 북한정권에 저항을 했다는 증거일까? 판단은 아직은 섣부르다.

시인 신경림의 말대로 80년대 말 해금(解禁)때까지 남북 모두에서 잊혀졌던 임화는 '역사의 격랑을 가장 뜨겁게 산 사람' 이다. 따라서 임화를 제대로 찾는 작업이란 현대사 자료발굴과 함께 이제 겨우 시작됐는지 모른다.

조우석 문화부 출판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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