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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60년] 서울 거쳐 평양으로 (79) 마지막 관문을 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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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1950년 10월 38선 이북으로 진군한 미군이 북한군 토치카에 화염방사기를 발사하고 있다. 쫓기던 북한군은 평양 근처에서 조직적인 저항을 시도했지만 쉽사리 무너졌다. [중앙포토]

전투는 어떻게 보면 대형 공사를 완성하는 과정과 흡사하다. 부족한 곳을 메우고, 내게 넘치는 부분은 제때 거둬들일 줄 알아야 한다. 기계적으로 공격을 퍼부어야 할 순간에는 과감하게 화력과 병력을 투입해야 한다. 그러나 물러날 때에는 역시 과감하게 물러나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전선의 동향을 정확하게 읽고, 그 배후에 숨은 상대의 의도와 약점을 제대로 짚어야 한다. 일선에서 피를 흘리며 분전하는 병사들의 고생이야 이루 말할 수 없이 크지만, 장막 속의 지휘관들 또한 그와는 다른 차원의 고민과 번민에 휩싸일 때가 많다.

전투가 길어지고 있었다. 평양 외곽 20㎞ 지점의 지동리에서 벌이는 적의 저항이 만만치 않았다. 그 막힌 곳을 뚫고 나가야 평양에 닿을 수 있음은 물론이다. 이 지동리를 그대로 두고 다른 쪽의 진격로를 연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다. 더구나 미 1기병사단과 선두 경쟁을 벌이고 있는 상황이어서 시간을 허비할 수 없었다.

지동리에 들어서는 곳의 양쪽 야산에 적은 수많은 토치카를 설치했다. 그곳으로부터 기관총과 박격포 등의 사격이 맹렬하게 펼쳐졌다. 둘러갈 수는 없었다. 오로지 뚫고 나가는 길밖에 없었다.

격렬한 적의 저항에 우리도 맹렬한 반격을 가하면서 전투가 열기를 뿜고 있었다. 저녁 6시 무렵에 시작된 전투는 계속 이어졌다. 적들은 결코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야간전투에 약한 미군도 사력을 다하고 있었다. 맹렬하게 포격을 가하고, 탱크도 수시로 적 정면으로 기동해 들어가 포격을 가했다. 그러나 야산 곳곳에 숨겨진 적의 토치카는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장막 속에서 지휘관 회의를 열었다. 위험한 야간 공격을 감행해야 했다. 김동빈 11연대장과 김점곤 12연대장, 그로든 미 제6 전차대대장이 과감한 공격을 주장했다. 적극적인 성격의 그로든 대대장은 전차 기동 계획을 설명하면서 “보병은 전차를 따르라”고 자신 있게 말했다. 그러자 갑자기 고사포단의 헤닉 대령이 “닥쳐(Shut up)”라고 소리쳤다. 이어 그는 “모든 전투계획은 보병이 먼저 결정하고 다른 병과는 이에 협력해야 하는 게 원칙”이라며 그로든을 크게 나무랐다. 그로든이 꼼짝을 못 했다. 그로든이 미 육군사관학교인 웨스트포인트 생도로 재학할 때 헤닉은 스페인어 교관이었다. 사제(師弟)의 관계였으니 헤닉의 꾸중에 그로든은 한마디도 대꾸할 수 없었던 것이다.

문제는 11연대와 12연대장이 선두 경쟁을 벌인다는 점이었다. 두 사람 모두 진공의 선두에 서고 싶어 했다. 11연대장 김동빈 대령의 불만이 심했다. 지금까지의 공격 과정에서 12연대 김점곤 대령이 늘 선두를 맡았다는 점 때문이었다. 그는 회의장에서 일어나 “왜 12연대에만 기회를 주느냐”면서 노골적으로 그 불만을 토로했다.

그러나 그로든 대대장이 이 문제의 답을 제시했다. 그는 “이제까지 12연대와 보전(步戰:보병과 전차) 합동작전을 잘 펼쳤는데, 여러분 잘 아시다시피 말을 타고 강을 건널 때 말을 바꾸면 되겠느냐”면서 12연대 편을 들었다.

늘 이렇게 갑론을박을 벌이는 게 좋다. 그러나 귀결점도 잘 찾아야 한다. 모두의 의견을 충분히 들었다. 내가 판단할 때였다. 나는 사단의 3개 연대 공격로를 세 갈래로 나눴다. 지동리의 적 전선을 돌파하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었다. 먼저 사동이란 곳을 뚫어 탄광 쪽으로 진출하는 길이다. 나머지는 지동리 정면을 치고 나가는 것이었다. 11연대는 사동의 탄광을 거쳐 평양 비행장으로 가도록 했고, 12연대는 지동리 정면을 맡게 했다. 조재미 대령의 15연대는 동쪽으로 크게 우회해 평양 북쪽인 모란봉을 돌아 시내로 진입하도록 했다.

전투는 격렬하게 벌였지만 쉽게 승패를 가를 수는 없었다. 이곳을 내주면 평양이 함락된다는 점을 적 지휘부는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새벽까지 전투가 이어졌다. 동이 트기 직전인 4시쯤에 좋은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12연대는 야산 아래까지 바짝 붙어서 맹렬하게 사격을 가하면서 적을 몰았다. 야간 공습도 벌어졌다. 헤닉 대령이 이끄는 미 고사포단은 산 위의 적을 향해 맹렬하게 포격을 뿜어댔다. 거센 화력이 산 위를 맹타하면서 불꽃이 그날 어두운 밤을 장식했다. 적은 역시 그 화력에 밀렸다.

토치카가 한둘씩 비어 가는 느낌이 왔다. 적들이 공세를 이어가지 못하고 하나둘씩 토치카를 비우고 도망을 가는 것이었다. 막바지에 몰렸다는 심리적 작용이 더 컸을 것이다. 자신감을 잃으면 모든 게 한꺼번에 무너진다. 사동으로 진출한 11연대도 이때쯤 적의 전면을 무너뜨리고 있었다. 전투의 격렬한 소음이 차츰 줄어들고 있었다. 12연대 부대원들이 산을 올라가 적의 후퇴를 확인했다. 저녁 6시에 시작한 전투가 10시간 넘게 벌어지다가 끝을 맺은 것이다.

전날 밤의 장막 속 회의에서 나는 평양의 문화재를 언급했다. 대동문과 을밀대·연광정 등 평양에는 문화재가 숱하게 있다. 나는 미군들에게 이 문화재에 절대 포격 등을 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다. 그 점을 헤닉 대령이 “충분히 이해한다”며 진지하게 받아들여 줬다. 그렇게 평양에 입성하는 순간까지의 주의 사항들을 모두 챙겼다. 이제 지동리를 넘어 평양으로 진군할 차례였다. 지동리를 넘는 순간 날이 밝아 왔다. 뿌옇게 물드는 하늘색을 바라보며 길을 떠났다. 그곳을 넘는 순간 광대한 평야가 펼쳐졌다.

백선엽 장군
정리=유광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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