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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극적 저항 대신 민족 정체성 연구 택한 육당 최남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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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3·1운동 직후 영어(囹圄)의 몸이 되었을 때 수인번호 1605번을 단 최남선(崔南善, 1890~1957). 항상 미투리를 신고 두루마기를 휘날리며 동분서주했던 그를 당시 사람들은 “1인 3역”, 또는 “최미투리”라고 불렀다.

1919년 기미독립선언서의 초를 잡았던 민족지도자 최남선. “자기의 본질을 투시하고 자기의 입지를 정시하는 점에서 역사는 진실로 유일 정확한 영사막이다. 자각이 필요하고 자주가 급무인 민족·사회일진데, 무엇보다 먼저 자기 역사에 대해 정확한 관념을 가지기에 힘쓸 것이다(『조선역사통속강화』, 1922).” 그는 2년여의 옥고를 치르고 출옥한 후, 일제에 적극적으로 저항하길 포기하고 조선 역사와 문화 연구를 통해 민족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학술 활동을 펼쳤다. “지조냐 학자냐의 양자 중 하나를 골라잡아야 하게 된 때에 대중은 나에게 지조를 붙잡으라 하거늘, 나는 그 뜻을 휘뿌리고 학업을 붙잡으면서 다른 것을 버렸다.” 1949년 마포형무소에 반민족 행위자로 수감된 그는 스스로 과오를 조목조목 지적한 ‘자열서(自列書)’에 밝힌 바와 같이, 일제 말 중추원 참의와 만주 건국대학 교수 등을 역임하며 이 땅의 젊은이들에게 일제의 침략전쟁에 나갈 것을 권유하는 잘못을 범했다. “공개·비공개를 통해서 수천 학생과 토론한 것이며, 내가 이런 말을 아니 했다고 못하는 동시에 들은 이들이 듣지 않았다고 할 리 없으며, 그 상세한 것은 그런 이의 입을 빌렸으면 한다.” 그때 건국대학 학생이었던 강영훈 전 국무총리는 육당이 학병을 권유한 진의를 이렇게 증언한다. “독립을 쟁취하는 데 있어서 여러 가지 고려할 점이 있지만, 군사력과 군사기술은 가장 중요한 점이 아닐 수 없다. 이제 일제는 자기들이 곤경에 빠져서 우리 민족을 이용하려 하고 있지만, 우리는 이 기회를 이용해서 민족의 군사력을 양성해야 한다(『나의 스승 육당』, 1988).” 어찌 보면 그는 이광수와 마찬가지로 “민족을 위한 친일”을 부르짖은 ‘소신 친일파’였다. 광기의 시대를 살았던 시인 김소운도 이들이 저지른 잘못만이 아닌 공덕도 함께 돌아보아야 함을 일깨운다. “민족을 배반했느니, 절개를 굽혔느니 해서 육당·춘원 같은 분이 지금 본국에서도 비난의 초점이 되어 있지만, 그분들이 여러분만치 이 백성, 이 민족을 사랑하지 않았다고는 행여 생각하지 마오. 그분들은 이를테면 종두의 역할을 한 것이다. 그릇된 시대의 열병 속에 있는 민족 전체를 대신해서 부스럼이 되고, 화농하고 한 희생자들인 것이다. 입으로만 하는 말이 아니오. 나는 사실 이 두 선배를 그런 눈으로 보아왔다(『악몽의 계절』 『역려기』, 1966).” 육당 탄생 120주년을 맞는 오늘. “어찌 티가 있다 하여 옥을 버릴 수야 있으랴. 옥은 옥으로서 우리 역사상에 길이 빛날 것을 믿어 마지않는다(‘육당 10주기에 즈음하여’, 1967).”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이희승 선생의 일침이 우리의 폐부를 찌른다.

허동현 경희대 학부대학장·한국근현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