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을 열며] 냉전적 보수, 냉전적 진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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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임동원 통일부 장관의 해임건의안 가결후 한국사회는 새로운 논쟁의 열기에 사로잡혀 있다. 겉으로는 햇볕정책의 종언(終焉)과 지속 여부에 대한 논쟁의 형식을 띠고 있지만 그 핵심은 포스트(post)-냉전, 포스트-분단, 포스트-3김체제의 창출과 이에 대한 대응에 관한 것이다.

임동원 장관의 해임을 둘러싸고 벌어졌던 남북교류 및 대북 포용정책에 대한 갈등과 분열, 그리고 그 본질에 대한 논의는 이제 한걸음 비껴 '정치권의 새판 짜기' 라는 새로운 화두에 자리를 물려준 것처럼 보인다.

*** 진부한 '새판 짜기' 주역들

'새판 짜기' 의 주역은 여전히 지난 50여년의 냉전구조 속에서 한국 현대정치사를 좌지우지해 온 3金이다. 냉전이 종식된 후 인류가 새롭게 맞이한 21세기, 새 밀레니엄의 시작에 세계 각국이 새로운 리더십과 국가구조의 근원적 개조에 힘을 쏟는 데 반해 이들의 판짜기 방식은 지극히 과거 냉전 때의 것과 흡사하다.

이들은 보수와 개혁이라는 그럴듯한 단어로 치장하고 있지만 행태는 한반도 주변에서 벌어지는 새로운 흐름과는 담을 쌓은 폐쇄주의.지역주의.연고주의에 기초하고 있다.

어떻게 보면 소련과 동유럽의 몰락 후에도 여전히 냉전의 고도(孤島)로 남아있는 한반도의 상황 속에서 보다 더 독한 냉전적 보수와 냉전적 진보로 재탄생해 대결을 벌이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이 어떠한 명분을 내세운다 해도 결국 이것이 정권재창출과 정권탈환이라는 목표만을 위한 양의 탈을 쓴 정치인들의 감언이설처럼 들린다는 사람들이 많다.

과거에 이들은 독재와 민주주의라는 대결점의 양끝에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보수와 진보, 혹은 퍼주기라는 단어의 양끝에 서는 것으로 위치를 바꾸었을 뿐이다.

보다 더 엄밀히 분석해 보면 이는 세계사적 변화의 흐름과는 담을 쌓은 채 우리 삶의 공간과 역량과 운명이 마치 한반도 내부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처럼 착각하는 착시현상에서 비롯된 시대착오적인 것이다.

냉전시절 소련과 미국의 강경파 지도자들은 서로 상대방이 죽어주지 않기를 바랐다.

서로를 쓰러뜨리려고 노력하면서도 상대의 존재 때문에 스스로의 존재의 정당성을 인정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에 서로 지역적 맹주임을 자처하면서 상대의 존재 때문에 자신의 존재도 인정받고 다 같이 서로 대결하는 구도, 즉 냉전구도의 존속을 원하고 있는 세력들이 많고 이러한 세계관에 갇힌 자들이 많다는 점에서 보면 현 상황을 즐기는 이들이 알게 모르게 늘어날 수도 있다.

하지만 한국사회에는 냉전체제의 극복을 진정으로 원하는 말 없는 다수들이 있다.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관철하는 힘이 정치.경제.사회의 모든 영역에서 냉전적 관행을 보다 더 고착시키는 쪽으로 작용하는 데 환멸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소위 글로벌 스탠더드를 거론하지 않더라도 바깥 세상의 보편적 흐름과 우리 사회의 미래에 대한 준비간의 격차 때문에 실망하고 한국을 등지는 사람들도 그들 중 하나다.

하지만 바이러스가 항생제에 내성이 강해지듯 한국사회의 냉전적 보수와 냉전적 진보세력은 일반인이 잘 알지 못하는 '낡은 사회주의 이념' '신자유주의' 라는 단어를 들먹거리며 탈냉전적 구조와 분위기에 저항한다.

*** 세계화 시대 사고 전환을

양쪽 다 속내를 여간해서는 드러내지 않지만 냉전적 보수는 과거에 성공했던 냉전시대의 경제성장 모델에 대한 집착이 강하고 그래서 이른바 개혁을 싫어한다.

또 냉전적 진보도 과거 냉전시대 형성된 재벌에 대한 강한 대응세력으로서의 강력한 노동자 조직을 옹호하기 때문에 구조조정을 싫어한다. 세계화 시대 남들은 뛰고 있는데 우리는 다시 거꾸로 간다면 그들과의 격차는 점점 더 벌어질 수밖에 없다. 어느 민족이나 역사적 전환기에는 극복해야 할 시대적 과제가 있다. 한국민은 21세기 벽두에 냉전적 구조와 사고를 극복해야 하는 게 우선과제다.

김석환 <국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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