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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프 기자를 ‘외도’하게 한 윤응렬 장군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163호 16면

그를 만난 건 골프 연수차 캘리포니아에 머물던 2006년이었다. 당시 미국 샌디에이고 부근 딸의 집에 머물고 있던 그와 우연히 라운드할 기회가 있었다. 그의 드라이브샷 거리는 210야드 정도, 쇼트게임 실력도 만만찮았다. 그는 170야드 거리의 파3 홀에선 그 흔해빠진 하이브리드 클럽 대신 5번 아이언을 꺼내들어 필자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올해 여든세 살의 윤응렬 옹이다(필자는 예비역 공군 소장인 그를 윤 장군님이라고 부른다).

정제원의 캘리포니아 골프 <108>

윤 장군은 필자의 아버지뻘이다. 그런데도 그는 항상 깍듯하게 존댓말을 했다. 가끔 동반 라운드를 하면서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면서 필자는 그가 끊임없이 저승의 문턱을 넘나들며 살아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일본 강점기 가미카제 특공대로 죽을 고비를 넘겼던 데부터 시작한 이야기는 북한군 공군 중위의 스토리로 이어졌고, 대한민국 전투기를 몰고 한국전쟁에 참전했다는 대목에서는 전율까지 느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언젠가 때가 되면 그의 이야기를 세상 사람들에게 전달하리라’ 마음먹었다.

그 이후 4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는 여전히 골프를 즐긴다. 이전과 달라진 점이 있다면 드라이브샷 거리가 아주 조금 줄어들었다는 것과 청각신경이 쇠퇴한 탓에 약간 큰 소리로 이야기해야 알아듣는다는 것 정도다.

그는 지난 3월 26일 캘리포니아주 라코스타 골프장으로 필자를 찾아왔다. LPGA투어 KIA클래식에 출전하는 미셸 위에게 전해줄 서류 봉투를 손에 든 채였다.

그는 2008년 작고한 미셸 위의 할아버지가 생사를 함께했던 전우라고 말했다. 그러고는 서류봉투 안에 들어 있던 옛 사진들을 보여주었다. 사진 속에서 그는 미셸 위의 할아버지(고 위상규 옹)와 함께 웃고 있었다.

여기서 한 가지 고백을 해야겠다. 필자가 골프 전문기자의 길을 선택한 데는 정파 간의 다툼이나 어설픈 이념 논쟁에 휩쓸리지 않아도 된다는 점도 작용했다. ‘골프를 부자의 스포츠’라고 폄훼하는 이도 적지 않지만 본질적으로 골프 자체는 보수도, 진보도 아니다. 그런데 골프 ‘전문’을 자처하는 필자도 이번만큼은 외도를 하고 싶었다.

생사의 기로를 넘나들며 살아온 한 개인의 드라마 같은 히스토리를 꼭 내 손으로 전달하고 싶었다. 2010년은 한국전쟁 발발 60년이 되는 해. 더 이상 기다릴 이유가 없었다. 다행히 중앙SUNDAY의 에디터는 필자의 뜻을 흔쾌히 받아줬다. 그 결과물이 이번 주 중앙SUNDAY 6~7면에 나간다.

그는 여전히 필자의 훌륭한 라운드 파트너다. 거리는 조금 줄었지만 지난달에도 그는 여전히 녹슬지 않은 샷을 보여줬다. 요즘도 샷 거리를 늘리기 위해 부단히 노력 중이란다. 골프가 아니었더라면 윤 장군과의 인연은 없었을 것이다. 그의 드라마틱한 삶의 단면을 엿볼 기회도 없었을 것이다. 이래서 골프는 좋은 거다. 40년의 나이 차이를 넘어 친구가 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 골프다. 필자는 그의 철학과 주장이 모두 맞는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여든을 넘은 나이에도 기품을 잃지 않고 겸손하기 그지없는 삶의 태도만큼은 배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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