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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유럽은 ‘문명 이슬람’을 이겼다, 그리고 역주행 300년이 시작됐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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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인류의 역사는 서로 다른 문명의 충돌과 융합으로 발전해 왔습니다. 이번엔 이슬람 문명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되돌아보게 할 『신의 용광로』을 소개합니다. 다문화를 수용하는 융통성에 방점을 찍은 책입니다. 그리스 전문가로 통하는 유재원 교수의 『터키』도 함께 소개합니다. 진정한 ‘세계인’은 타 문화에 대한 이해와 관용에 있다는 것을 다시금 음미해 봅니다.

신의 용광로
데이비드 리버링 루이스 지음
이종인 옮김, 책과함께
671쪽, 3만3000원

『신의 용광로』는 이슬람·기독교 교류사를 보는 서구의 고정관념을 물구나무 세워버린 대담한 저술이다. 타 문명의 영향을 받지 않은 채 자족적인 역사라면서 그 동안 ‘나 홀로 영광’을 노래해온 유럽 중심주의·기독교 중심주의의 세계사를 뒤집어 놓는다. 이 책은 유럽의 탄생은 이슬람문명의 거대한 용광로 안에서 비로소 이뤄졌다는 관점을 유지한다. 가히 파천황(破天荒)의 시각이다. 구체적으로 용광로에 불이 당겨진 시점은 중세 유럽 초기다. 부제도 ‘유럽을 만든 이슬람문명 570~1215’이다.

그 점에서 『신의 용광로』는 큰 붓을 들어 쓴 역사책이다. 세필(細筆)로 쓴 아기자기한 역사가 미시사·생활사라는 이름으로 유행하는 요즘 더욱 신선하게 읽히는 이 책의 가치는 실은 그 이상이다. 미 뉴욕대 석좌교수로 있는 저자는 문명 충돌의 기점인 9·11 직전에 이 책을 구상했다. 때문에 이 책을 읽는 행위란 교양과 독서행위의 차원을 떠나 공존의 가치를 앞세운, ‘그라운드 제로 이후’의 흐름에 미리 발을 담가보는 스릴 넘치는 문명 체험의 기회다.

이 책의 하이라이트는 732년 가을에 벌어진 푸아티에 전투다. 피레네 산맥에서 96km 떨어진 푸아티에는 프랑스의 중부 평원. 여기에서 기독교 군대와 무슬림 군대가 맞선 건곤일척의 싸움이 벌어졌다(유감스럽게도 책에 양쪽의 병력 수는 나오지 않는다). 문명사적 의미를 가진 전투였다. 기존 유럽사는 프랑크족의 지도자 카를 마르텔이 기대 밖의 대승을 거둠으로써 이슬람의 야욕으로부터 기독교를 구원한 전투라고 거품을 물어왔다.

뉴욕대 석좌교수인 데이비드 리버링 루이스는 무슬림 군대와 기독교 군대가 격돌한 푸아티에 전투(732년)에서 무슬림 군대가 승리했을 경우 천문학, 삼각법, 아라비아 숫자 등이 자연스럽게 유럽에 소개되며 유럽문화가 더욱 번창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사진은 유럽 속 이슬람 도시로 통하는 그라나다의 알람브라 궁전. 1236년 기독교 세력에게 코르도바 지배권을 빼앗긴 이슬람 세력이 왕조를 세우면서 지은 것이다. [중앙포토]

스페인을 점령한 기세로 피레네 산맥을 넘어오던 야만적 무슬림의 기관차를 이 전투에서 가까스로 멈춰 세웠고, 서구문명을 극적으로 구출했다는 자화자찬이다. “역사상 이보다 더 중요한 전투는 없었다”(19세기 독일 전쟁사학자 한스 델브뤼크)는 것이며, “세계의 운명을 좌우했던 순간”(사학자 앙리 마르탱)이라고 서술된다. 가장 극적인 표현은 『로마제국 흥망사』의 대역사학자 에드워드 기번으로부터 나왔다.

기번은 푸아티에 전투 이후 무려 천 년이 지난 시점에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이 전투에서 만일 서구가 패배했더라면, 지금 자기는 옥스퍼드대학에서 코란을 가르치고 있었을 것이라며 몸서리를 친다. (266쪽) 하지만 『신의 용광로』는 냉정한 어투로 잘라 말한다. 당시 서구는 그 전투에서 패배하는 게 더 좋았을 것이고, 그랬을 경우 이슬람의 앞선 문명을 미리 흡수할 수 있었던 계기라고 말한다. 다분히 반(反)서구의 목소리인데, 이유는 무엇일까?

“(푸아티에 전투에서 패배했더라면) 로마 이후의 서양은 아마도 세계국가인 이슬람 제국으로 흡수됐을 것이다. 그 제국 내에서는 성직자 계급이 따로 없고, 모든 종교적 신앙은 존중 받았을 것이다. 얻을 수 있는 문명의 이득으로는 천문학·삼각법·아라비아 숫자·그리스철학의 집대성이다. 그 경우 우리 유럽은 267년의 세월을 벌었을 것이다. 종교전쟁은 일어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268쪽 요약)

즉 이슬람을 가까스로 막아낸 중세 유럽은 이후 종교박해와 문화적 배타주의 그리고 세습정치를 거리낌없이 내세웠고, 그 결과 300년 가까운 역주행을 거듭했다는 것이다. 르네상스 이전 ‘황폐화된 유럽사’ 300년에 대한 냉정한 자기반성이다. 기존 유럽사는 이슬람 세계가 그리스·로마의 고전문화를 보존하였다가 이를 유럽에 전해줌으로써 르네상스에 ‘약간의’ 영향을 줬다는 식인데, 그런 자린고비 식의 역사는 안 된다는 지적이다

실제로 아라비아 반도 변방에서 성장한 이슬람 세력은 711년 지브롤터에 침공하여 1085년 이슬람 군대가 톨레도에서 패퇴할 때까지 400년 가까이 유럽의 서쪽 스페인에 정착했다. 종교적 관용을 표방한 무슬림 사회는 유대교·기독교 인구를 융합하여 선진 문화를 만들어 냈다. 그런 이슬람 문명의 ‘유럽 만들기’는 13세기 초까지 계속됐다.

이제 출판계는 이 책과 함께 보다 다양한 시각의 동서교류 역사책을 갖게 됐다. 최근 선보인 앨버트 후라니의 『아랍인의 역사』가 아랍 1400년사에 대한 균형 잡힌 서술이고, 이슬람문명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담은 버나드 루이스의 『중동의 역사』도 오래 전 선보였다. 아이라 라피두스의 『이슬람 사회의 역사』도 레퍼런스(reference·추천도서)에 해당한다. 『신의 용광로』의 무게? 또 다른 레퍼런스 급의 저술이 분명하다.

조우석<문화평론가>


터키, 여기서 동양은 서양으로 가고, 서양은 동양으로 갔다

터키, 1만 년 시간여행 1·2
유재원 지음, 책문
1권 480쪽·2만2000원
2권 384쪽·2만원

34년 전 이스탄불 아기아 소피아 대성당에서 나와 길을 걸으며 눈물을 흘리던 한 동양 청년이 없었다면 이 책은 나오지 않았겠다. 1976년 4월 말, 그리스에서 유학하던 청년은 부활절 방학을 맞아 기차를 타고 이스탄불로 갔다. 그곳에 도착해 가장 먼저 찾은 곳은 소피아 성당. 그곳에서 문득 그는 자신이 이 곳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에 무지에 대한 창피함과 억울함을 느꼈다고 했다. 청년은 눈물을 훔치며 “자식들에게는 이런 무식과 무지를 절대로 물려주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책을 쓴 한국외국어대 그리스발칸어학과 유재원 교수의 얘기다.

‘동서 문명의 교차로, 자세히 읽기’란 부제를 단 이 책은 이스탄불부터 앙카라·카파도키아·트로이아까지 터키의 구석구석을 직접 밟으며 그곳에 얽힌 신화와 역사, 문명을 자세히 소개한다.

이스탄불과 아기아 소피아 성당에 얽힌 역사를 적은 대목만 해도 적잖은 분량이다. 6세기에 세워진 소피아 성당은 이스탄불과 함께 도시의 영욕을 온몸으로 겪어온 상징적인 공간이다.

“대성당에서 밖으로 나오면 무슬림이 기도하기 전에 얼굴과 손발을 씻던 수도시설이 오른쪽에 있고, 왼쪽에는 비잔티온 제국 시대에 세례실로 쓰이다가 오스만터키 제국에게 정복된 뒤에 술탄들의 무덤으로 전용된 건물이 있다. 그리스 정교회와 이슬람이 엇박자를 내며 어우러지는 공간….”

터키 최대의 이슬람 성지인 콘야에서는 이슬람의 신비주의 교단의 창시자 메블라나 루미(1207~1273, 이슬람의 신비주의 철학자이자 시인)를 떠올린다. 해마다 터키인들은 그의 묘를 찾아 참배를 올리는데, 무덤 위의 비명에는 이렇게 써있다고 한다. “우리가 죽으면, 땅의 무덤에서 우리를 찾지 말고,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 찾아라!”

고대 7대 불가사의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아르테미스 신전이 있는 에페소스 유적지, 쿠르드족의 수도 디야르바크르 등을 차례로 찾아가는 저자는 성당 바닥의 모자이크, 수많은 조각상, 그리고 돌멩이 하나에서도 무궁무진한 이야기를 끌어낸다.

저자는 말미에서 “이제 길고도 지루한, 터키 땅에 대해 온갖 시시콜콜한 이야기까지 쓴 자신이 대견하기도, 미련하기도 느껴지기도 했다”고 털어놨다. 하지만 행여 한 걸음이라도 헛되이 하지 않겠다는 요량으로 촘촘하게 담으려 애쓴 저자의 욕심은 고맙게 읽힌다. 앞으로 터키를 찾아갈 이들은 터키의 ‘폭과 깊이’를 만날 수 있게 됐다. 34년 전 저자가 이스탄불에서 흘린 눈물은 헛되지 않은 듯하다.

이은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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