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산은 산 물은 물 (68)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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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68. 부인 남산댁의 출가

성철스님의 부인인 남산댁 이덕명 여사가 성전암으로 찾아간 것은 담판을 짓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부인이 남긴 뒷날의 회고.

"도(道)가 좋으면 혼자 가면 되지, 왜 하나밖에 없는 딸까지 데려가느냐. 딸은 내가 잘 키워 놓을 테니 딸만은 돌려달라고 담판할라 했는데…. 그런데 담판은 고사하고 쫓겨내려오고 말았던 거지. "

따져보면 남산댁에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성철스님에 이어 딸 수경(불필스님)이 출가했을 뿐 아니라, 수경이 집을 떠난 다음해인 1957년 4월 12일 시어머니(성철스님의 어머니) 초연화(超然華)보살도 세상을 떠났다. 수경의 할머니는 "다음 생에는 내 기필코 스님이 되겠다" 는 서원을 세우고는 출가한 사람처럼 삭발하고 장삼을 입고 삶을 마감했다.

기댈 곳이라곤 피붙이 딸뿐이었다. 남산댁은 수경이가 불필이라는 불명을 가지고 이 선방, 저 선방 참선공부하러 다닌다는 것을 풍문으로 들었다. 그러다 불필스님이 경남 언양 석남사에 머물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 갔다. 딸의 얼굴을 10여 년만에 보리라는 기대감에 부푼 발길이었다.

역시 그 아버지에 그 딸이다. 어머니가 찾아 왔다는 전갈을 받은 불필스님은 산으로 도망쳤다. "공부 다 하고 돌아 가겠으니 찾아오지 말라고 전해달라" 는 말만 남기고. 어머니의 섭섭함이야 이루 말할 수 있겠는가. 어머니 남산댁은 "독사보다 더 독하다" 는 한 마디를 남기고 돌아갔다.

그렇게 돌아섰다고 모정(母情)이 끊어질 일은 아니다. 남산댁은 그 뒤에도 두 번이나 석남사를 찾아왔다. 두번째도 못만나고, 세번째 찾았을 때는 석남사 주지였던 인홍(仁弘)스님이 안타까운 마음에 나섰다.

"성철스님은 이제 저렇게 도명(道名)을 떨치시고, 딸은 또 이렇게 불철주야 참선정진하고 있는데 남산댁도 이제는 마음을 바꾸어야 하지 않겠소□ 세상 그렇게 힘들게 살았으니 남산댁도 이제 모든 것 다 버리고 절에 들어와 우리 같이 삽시다. 그러면 그렇게 보고 싶은 딸도 부처님 앞에서 볼 수 있고 말이오. "

불필스님의 은사인 인홍스님의 말씀은 구절구절 남산댁의 마음에 와닿았다. 세속에 연연할 인연도 없다. 그 말을 듣고 며칠 뒤 남산댁도 출가를 결심했다. 67년 봄 석남사에서 출가해 일휴(一休)라는 법명을 받았다. 평생 한숨 속에 지새다가 마침내 출가로 쉼터를 얻었다는 법명이다.

일휴스님은 늦게 출가했지만 그만큼 남에게 지지 않으려고 열심히 정진했다. 말년에는 무릎 관절염으로 고생을 하면서도 흐트러짐 없이 수행에 매진했다. 말년엔 아무 정신이 없는 것 같은데도 손에서 염주를 놓지 않고 24시간 굴렸다. 불필스님의 회고.

"출가해서도 나에 대한 애착을 버리지 못해 당신 자신보다 나를 더 생각하는 모습을 자주 보았지요. 그러면서 이 세상 모든 어머니상이 어찌 다르겠는가, 가장 어리석은 바보는 어머니구나 싶더라고요. 나는 어머니가 늦게 출가하셨지만 참다운 발심을 하여 정진할 수 있도록 바라며, 될 수 있으면 멀리서 바라만 보았지요. "

83년 여름, 며칠째 비가 계속 내리던 가운데 불필스님은 석남사 심검당에서 사흘간 머물며 정진하고 있었다. 아침 일찍 어머니 일휴스님의 시자스님이 찾아와 "급히 찾는다" 고 해 "오늘은 내려갈 예정" 이라며 돌려보냈다.

마침 중복날이었다. 중복날이면 스님들은 옥류동 계곡에서 물맞이(목욕)를 하고, 찰떡국이나 감자떡을 먹으며 더위를 식힌다. 다른 스님들이 계곡으로 나간 사이에도 불필스님은 오랜 도반 백졸스님과 함께 일휴스님 곁을 지켰다. 저녁 무렵, 옥류동에서 돌아온 다른 스님들과 함께 저녁을 먹고 잠깐 쉬고 있는데 시자가 달려왔다.

"일휴스님께서 저녁 공양에 찰떡국을 한 술 잡수시고 두 술째 뜨다가 그대로 앉아 숨을 거두셨다고 하더군요. 장작더미에 불이 훨훨 타고, 육신은 한 줌의 재가 되고, 다시 그 재를 동서남북으로 뿌리니…, 사람의 한 생이 너무나 허무하더군요. "

원택 <성철스님 상좌>

정리=오병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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