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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워치] 씻기지않는 오점 인종차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2면

남아공 더반에선 지금 대규모 국제행사가 열리고 있다. 지난달 31일 개막돼 오는 7일까지 계속될 유엔 주최의 인종차별 철폐 세계회의가 그것이다. 1백30여개국 대표들과 비정부기구(NGO) 대표 1만4천명이 참석한 이번 회의는 인류역사의 뿌리깊은 해악인 인종차별을 없애기 위한 인류차원의 노력이라는 점에서 뜻이 깊다. 회의가 과거 인종차별국가로 악명 높았던 남아공에서 열린 것도 의미심장하다.

더반회의에서 다루는 의제는 ▶식민지배▶노예제▶여성과 어린이 인신매매▶아시아 신분제도▶소수민족과 외국인 노동자 차별 등 다양하다. 하지만 중심의제는 식민지배와 노예제다. 그중에서도 특히 이스라엘 시오니즘에 대한 논쟁이 뜨겁다.

아랍권은 시오니즘을 식민지배와 인종차별의 한 형태로 규정한다. 이스라엘을 옹호하는 미국은 대표의 격(格)을 크게 낮춰 파견하더니 경우에 따라선 조기 철수할 수 있다고 으름장을 놓고 있다.

시오니즘이 인종차별이냐 아니냐는 오랜 숙제다. 1975년 유엔총회는 시오니즘을 인종차별이라고 규정한 바 있다. 시오니즘이 유대인 국가 건설엔 기여했지만 그로 인해 고향을 떠난 수많은 팔레스타인인들은 난민으로 전락했다.

이스라엘은 이들의 귀환을 거부하고 있다. 이스라엘에 남은 팔레스타인인들도 2등국민 대접을 받는다. 또 67년 제3차 중동전 때 이스라엘이 점령한 요르단강 서안과 가자지구는 사실상 이스라엘의 식민지다.

91년 중동평화 분위기가 고조되면서 유엔은 시오니즘을 인종차별로 규정한 결의를 철회했다. 이어서 93년 요르단강 서안과 가자지구에서 팔레스타인 자치를 허용하고 궁극적으로 독립국가를 세우는 오슬로합의가 이뤄짐으로써 평화가 뿌리를 내리는 듯했다.

그러나 지난해 9월 팔레스타인 인티파다(봉기) 재발 이후 상황은 악화일로에 있으며, 그 결과 더반회의에서 시오니즘이 다시 한번 주요 이슈로 등장한 것이다.

아프리카 국가들이 들고 나온 식민지배와 노예제 문제도 복잡하다. 나치독일이 유대인들을 박해한 데 대해 독일이 사죄.보상한 것처럼 과거 서구 열강이 아프리카인들에 대해 저지른 죄악도 사죄.보상하라고 요구한다.

일부 지도자들은 금전적 보상은 아프리카에 대한 모독이라고 반대하지만 대다수는 보상을 주장하면서 현실적 대안으로 아프리카 국가들이 지고 있는 외채 탕감과 경제원조 확대를 요구하고 있다. 서방국가들은 과거의 잘못은 사과하더라도 보상은 못한다는 입장이다.

인종차별은 인류역사에서 씻을 수 없는 죄악이다. 그것은 과거사가 아니라 지금도 살아있는 현실이다. 코피 아난 유엔 사무총장은 더반회의 개막연설에서 "유대인들이 희생 당한 경험이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에 대한 악행의 변명이 될 수 없다" 고 지적했다. 국제사회가 인종차별에 대해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는 것은 반(反)문명적이다. 아픈 상처를 그대로 둔 채 새로운 미래를 열 수는 없다.

정우량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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