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산은 산 물은 물 (65)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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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65. 딸 수경의 출가

수경(불필스님)은 경북 문경 깊은 산속 윤필암으로 다시 가 참선정진 대신 처음으로 기도를 했다.

"여름이나 겨울철 안거를 마치고 곧장 아버지 성철스님께 찾아가 그간의 공부를 보고하자면 큰스님은 그저 긴 말 없이 야단만 쳐 쫓아내니, 이제는 큰스님에게 의지할 것 없고 혼자 부처님께 의지해 깨칠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만 간절했지요. 그래서 일주일 동안 하루에 4천배씩 절을 했습니다. "

기도법도 모르고 기도하며 익숙지 않은 절을 4천 번이나 반복하니, 절하는 시간이 하루 20시간씩 걸렸다. 수경은 기도하면 인간에게 무한한 힘과 능력이 생긴다는 것을 그 때 처음 느꼈다고 한다. 확실히 느껴지는 '내부의 힘' 을 개발하면 영원한 대자유인이 될 수 있고, 개발하지 못하면 중생계의 고통(苦)이 끝날 날이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당연히 다른 일체의 잡념 없이 정진에 매진했다.

그러나 무의식 속에 들어있는 속세와의 끈은 끊어지지 않았다. 어느날 할아버지(성철스님의 아버지)가 꿈 속에 나타났다. 며칠 뒤 어떤 여신도가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는 전갈을 가지고 왔다. 이야기를 들으니 9일장이라 먼저 가매장을 했는데, 꿈에 할아버지를 뵌 장소가 바로 가매장한 곳이었다. 1959년 8월 28일이다. 할아버지는 출가한 아들의 이름을 외치며 숨져 갔다고 한다.

"할아버지 소식을 가져온 분이 그러더군요.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직전 저승사자가 눈에 보이는 듯 '나는 성철스님한테 간다. 이놈들아! 나는 성철스님한테 간다' 고 고함을 쳤다는 겁니다. "

환갑을 넘기는 노인이 드물었던 당시, 할아버지는 79세까지 장수했다. 그렇게 건강하던 분이었는데, 아들의 출가를 그렇게 뼈저리게 아파하시던 분이었는데. 그렇게 마지막 순간에 아들의 이름을 부르며 가셨다니. 수경은 할아버지에 대한 슬픔과 고마움과 죄스러운 마음이 불덩이처럼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솟아올랐다.

"얼마 뒤 성전암에 갔는데, 성철스님은 할아버지 돌아가신 데 대해 한 마디도 묻지 않더군요. 알고 있었을 텐데, 아무런 언급이 없었어요. 큰스님이 가족 일이나 지난 일은 절대 묻지 않으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

'급할수록 돌아가라' 고 큰스님께서 몇 번이나 말했는데, 곧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은 급한 마음에 정진을 거듭하다가 또 상기병이 도졌다. 다시 큰스님께서 일러주신 그대로 온 몸의 기운을 발바닥으로 끌어당기는 마음으로 수행을 하니 머리 아픈 것이 나아졌다. 나으면 또 급한 생각이 앞서 다시 상기병이 생기는 상태가 되풀이 됐다. 도저히 참선할 수 없을 정도가 됐다. 다시 성철스님에게 여쭈었다.

"아무리 해도 상기병이 완전히 낫지 않습니다. "

"상기병은 간단히 없어지는 병이 아이다. 할 수 없제. 쉬어가면서 천천히 할 수밖에. 장기전으로 대처해야제. "

수경은 '장기전' 이라는 말씀을 듣는 순간 정말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집을 나올 때 "3년 만에 공부를 마치겠다" 고 큰소리를 쳤고, 또 실제로 자신도 있었다. 그런데 장기전이라니. 믿기지 않는 마음에 다시 물었다.

"그러면 앞으로 어떻게 참선정진해 가야 합니까?"

"한 길로만 가면 결국은 성불할 수 있는 거다. 병나지 않게 천천히 장기전으로 나갈라카면 머리 깎아야 안되겠나. "

성철스님이 붓과 종이를 꺼냈다. 불필(不必)과 백졸(百拙), 수경과 친구 옥자에게 내린 법명이다. 딸에겐 '필요없다' 는 법명을, 그 친구에겐 '모자란다' 는 법명을 준 것이다. 그 자리에서 두 처자는 출가를 결심했다.

다시 성철스님의 명에 따라 많은 보살핌을 주던 인홍(仁弘)스님을 찾아 경남 울주군 석남사로 갔다. 그해 가을 인홍스님을 은사로, 자운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받았다. 머리를 깎고 예비 비구니가 된 것이다.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一日不作 一日不食). '

인홍스님이 강조한 철칙이다. 모든 스님들은 밭에 나가 채소 가꾸고, 논에 나가 모를 심어야 했다. 불필스님도 이 때 처음으로 흙을 만지고 해우소(화장실)에서 거름을 퍼 논에 뿌려보았다.

"만일 출가하지 않았다면 내가 언제 이런 일을 해볼 기회를 가질 것인가. "

그저 모든 것이 고맙고 보람된 시간들이었다.

원택 <성철스님 상좌>

정리=오병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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