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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 리뷰] '경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4면

인류를 지배하는 시간. 그 시간은 곧 경도이며, 그 기준은 영국의 런던 중심부로부터 7마일 떨어진 그리니치의 구(舊)왕립 천문대를 관통하는 본초자오선이다.

하지만 경도 0을 뜻하는 이 본초자오선은 눈에는 보이지 않는 상상의 선이다. 1884년 국제 자오선 회의에서 그리니치 자오선이 세계 기준으로 확정된 후에도 프랑스인들은 27년 동안이나 그 결정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정치적인' 선이기도 하다.

신간 『경도』는 그 경도와, 경도의 정확한 측정을 가능케 한 해상시계(크로노미터)의 발명에 얽힌 과학과 정치적 음모, 그리고 다양한 인간군상에 대해 다루고 있는 책이다.

뉴욕 타임스 과학부 기자 출신으로 『갈릴레오의 딸』 등에서 뛰어난 문장력을 보여줬던 데이바 소벨의 글과, 하버드대의 과학 유물 전시실 큐레이터인 윌리엄 앤드루스의 풍부한 도판 및 꼼꼼한 사진 설명이 이상적으로 배합돼 대중 과학서의 모범답안을 제시한다.

기원전 3세기부터 우리의 세계관을 종횡으로 가로지르기 시작한 위도와 경도. 15~18세기 지리상의 발견 시대에 항해를 떠나는 배들이 많아지면서 지구상의 위치를 알려주는 지표인 이 상상의 선들은 인류에게 더욱 중요해졌다.

하지만 바다에서 경도를 판정하는 일은 너무나 어려웠다. 당대 최고 수준의 바다 지도와 나침반을 갖추고 있던 위대한 선장들도 예외없이 길을 잃고 헤매다가 괴혈병과 갈증, 암초와의 갑작스런 충돌 등으로 악몽을 겪어야 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1714년 영국 의회는 경도상을 제정하고 2만파운드라는 거금을 내건다. 그렇지만 갈릴레이에서 뉴턴에 이르기까지 하늘에서 해답을 찾으려는 많은 노력은 실패로 돌아갔다.

이 때 등장한 존 해리슨이라는 한 독학(獨學) 시계공. 그는 세계 어느 곳에서도 정확한 시간을 유지하는 시계를 발명함으로써 마침내 위업을 달성한다.

하지만 이 무명의 '기계공 나부랭이' 는 경도상을 받기까지 무려 40여년간 정치적 음모와 학문적 중상모략, 국제적 전쟁, 경제적 격변 등을 겪으며 자연과학계의 유력인사들과 외로운 투쟁을 벌여야 했다.

이렇게 18세기 유럽을 생생히 되살려놓은 이 책은 "역사학.지리학.천문학.항해술.시계 제작술, 그리고 인간의 야망과 탐욕 중 어느 것에라도 관심을 가진 독자라면 수많은 보석을 발견할 것" 이라는 미국의 한 신문서평이 그다지 과장으로 느껴지지 않는 성공적인 저작물이다.

김정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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