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운영 칼럼] 머리와 가슴 사이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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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월마트에 의류를 공급하는 방글라데시의 청소년 노동을 문제삼아 1993년 미국 상원은 수입 금지를 의결했다. 그래서 청소년들은 행복하게 가정과 학교로 돌아갔는가? 천만에! 한층 더 나쁜 일을 하거나 때로는 매춘으로 몸을 팔았다.

지난 4월 캐나다 퀘벡에서의 미주 정상회담과 그 반대시위에 즈음해 폴 크루그먼 교수는 22일자 뉴욕 타임스에 그렇게 썼다.

개도국의 저임금을 '가슴으로' 비난할 것이 아니라 저임금 수출에 의한 고용증대를 '머리로' 계산하라는 말씀이다. 노벨경제학상의 유력한 후보라는 그의 글을 읽으면서 나는 마음이 편치 못했다. 그게 아닌데, 그래서 한번 치받고 싶은데 마땅히 잡을 꼬투리도 없고 해서 마치 화장실에 갔다가 그냥 나온 변비 환자꼴이었다.

*** 가슴으로 정책 결정하나

그런데 폴 스위지가 펴내는 진보적 잡지 '먼슬리 리뷰' 6월호의 편집자 서문에 '자본주의를 위한 프로 권투선수 : 폴 크루그먼 대 퀘벡 시위자들' 이란 제목으로 이 얘기가 실려 있었다.

편집자들도 그의 글을 읽고 변비 증세를 느꼈을까? 그러나 반론은 기대만큼 날카롭지 못했다. 일례로 98년 미국.캐나다.쿠바를 제외한 북미와 남미 전체의 대외 적자는 배당과 이자지급 5백40억달러를 합쳐 모두 9백억달러에 이르러서 크루그먼의 낙관과 달리 무역과 투자가 빈부격차를 넓힌다는 것이었다.

오히려 나는 인민의 기본욕구 충족에 수출도 중요하지만 그럴 때 '빈국에서 구조변화의… 가능성은 무시되고 만다' 는 구절에 눈길이 갔다. 머리만으로 현실을 수락하면 가슴이 필요한 어떤 현실 탈피도 가능하지 않다는 말씀이렷다.

개혁이니 구조조정이니 한창 시끄러운 국내경제에도 이것은 변함없는 진리일 듯하다. 개혁으로 어느 하나도 잃지 않고, 모두를 다 얻는다면 누가 그 개혁을 마다겠는가□ 관련기업에 상처만 남긴 '빅딜' 은 전혀 실속이 없었고, '워크아웃' 의 살생부 역시 제 살에 제가 맞은 꼴이었다.

이번이 '마지막' 이라는 약속을 수도 없이 되풀이하며 계속 끌려 들어가는 정부의 현대그룹 지원은 한국의 대외신인도를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특히 대우그룹 처리와의 차별 대우는 편파성 시비마저 낳고 있다. 글쎄 그것이 이헌재(李憲宰)장관과 진념(陳稔)장관의 차이인지, 정권 전반과 후반의 차이인지, 세계 경영과 북한 커넥션의 차이인지, 대우와 현대의 차이인지 온갖 추측이 가능하다.

다만 하나 확실한 것은 인체는 물론 정부 정책에도 머리가 가슴을 대신할 수 없듯이 가슴도 머리를 대신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97년 말 국제통화기금 탁치가 시작되면서 우리 경제에 몇개의 '돌격 목표' 가 생겼다. 예컨대 부채비율 2백% 이하, 국제결제은행(BIS)의 건전성 비율 8% 이상, 순자산 대비 출자총액 25% 이하의 기준이 그러했다. 부채비율 2백%와 2백1%에 실질적으로 어떤 차이가 있는지 모르겠으나 그 목표달성을 위해 기업은 엄청난 희생을 치렀다.

때로는 자산재평가 따위의 편법도 없지 않았지만 알짜배기 자산을 해외에 팔아 그 수치를 채운 경우가 허다했다. 그런데 불과 3년 만에 이 고지를 포기할 작정이다. 여야는 정책협의회에서 부채비율 완화를 비롯한 각종 돌격목표 재검토에 합의했기 때문이다.

한번 정했으면 절대로 바꾸지 말아야 한다는 말이 아니라 그렇게 간단히 바꿀 요량이라면 정할 때 한층 신중했어야 한다는 뜻이다. 가슴으로 정하고 가슴으로 폐하는 정책운영의 파행이 정작 머리가 필요한 개혁을 방해하고 있다.

*** 걱정되는 인기위주 시책

나이키 공장에서 생기는 이득을 취하려면 다국적 기업의 족쇄를 탓해선 안된다는 크루그먼의 주장은 일단 옳다. 마찬가지로 개혁이 성과를 거두려면 그것으로 잃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된다는 반론도 옳아야 한다.

경기부양을 위해 구조조정을 미루느냐, 구조조정을 위해 경기부양을 늦추느냐의 판단은 일차적으로 정책당국의 숙제다. 내가 보기에 정부는 이 숙제를 잘못하는 것 같다. 경기는 정권의 인기와 직결되며, 더욱이 내년에는 대통령선거가 잡혀 있다.

하루 살기가 힘겨운 사람들은 조속한 경기회복을 바라고, 한표가 아쉬운 정권은 그에 맞춰 인기위주의 시책만을 고를 것이다. 머리보다 앞서는 가슴의 정책, 그게 바로 포퓰리즘 아닌가?

정운영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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