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대종사 우렁찬 법문, 50m 밖서도 쩌렁쩌렁 울렸죠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7면

소태산 대종사

28일은 원불교 교조인 소태산(少太山·본명 박중빈·1891~1943) 대종사가 깨달음을 얻고 원불교를 연 대각개교절(大覺開敎節)이다. 소태산 대종사는 1916년, 스물다섯 때 깨달음을 얻었으니 올해로 95년째다.

19일 전북 익산시 원불교 총부를 찾았다. 창교 100주년을 목전에 둔 원불교에서 ‘대종사에 대한 숨 쉬는 기억’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익산 총부에는 지금도 ‘종법실(宗法室)’이 있다. 대종사가 생전에 직접 썼던 사무실이다. 원불교 익산 성지는 2005년 6월 근대문화재(제179호)로 등록됐다.

거기서 대종사를 직접 만난 적이 있는 원불교 원로 교무들을 만났다. 올해 85세인 문산(文山) 김정용 종사(원광대 총장 역임)와 81세인 아타원(阿陀圓) 전팔근 종사(교정원 부원장 및 원광대 부총장 역임)다.

문산 종사와 아타원 종사는 “원불교 안에서도 대종사님을 직접 뵌 사람이 20명 안팎이다. 건강 때문에 이렇게 인터뷰가 가능한 사람은 너 댓 명밖에 안 된다. 더 늦기 전에 대종사님에 대한 생생한 기억을 전해야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대종사가 법문을 했던 시절에는 축음기 판으로 목소리를 녹음했던 터라 현재 관련 영상물이나 녹음기록이 전혀 없는 상황이다.

익산시 원불교 총부 종법실 앞에서 문산 김정용 종사(왼쪽)와 아타원 전팔근 종사(가운데), 김주원 교정원장이 소태산 대종사에 얽힌 일화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소태산 대종사는 실제 어떤 분이셨나”는 물음에 문산 종사는 “바로 이 종법실에서 대종사님을 처음 뵈었다. 그때 저는 소학교를 졸업하고 막 익산으로 온 촌놈이었다. (출입문을 가리키며) 저 문으로 들어왔는데 대종사님이 이 방에 앉아계셨다. 그런데 벽이 꽉 차보이더라. 체구가 둥실둥실하고, 얼굴도 둥실둥실했다. 키가 180㎝가 넘으셨다”고 회상했다. 아타원 종사는 ‘대종사의 목청’을 기억했다. “굉장히 우렁찼다. 마이크도 없던 시절인데 대각전 법상에서 법문을 하시면 50m 떨어진 곳에서도 쩌렁쩌렁 울렸다. 바로 옆에서 듣는 것처럼 말이다.”

도산 안창호도 1936년 대전 감옥에서 출옥한 뒤 원불교단을 찾았다고 한다. 당시 대종사가 손을 잡으며 “민족을 위해 수고하시고 얼마나 노고가 많으셨냐”고 하자 도산은 “나의 일은 판국이 좁고 솜씨가 또한 충분치 못해, 민족에게 큰 이익은 주지 못하고 도리어 나로 인하여 관헌들의 압박을 받는 동지까지 적지 아니하다. 그런데 선생께선 일의 판국이 넓고 운용하시는 방편이 능란하시다. 선생의 역량은 참으로 장하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한번은 전주에서 유명한 깡패 대장이 소문을 듣고 “어떤 사람인지 직접 봐야겠다”며 대종사를 찾아왔다고 한다. 그런데 종법실 문을 열고 대종사를 처음 보더니 바로 큰절을 하고 무릎을 꿇고 앉더라는 것이다. 대종사는 “편히 앉으라”고 했고, 질문을 여럿 준비했던 깡패 대장은 “네, 네” “참 잘 하십니다”하는 말만 반복할 뿐 끝내 아무 것도 묻지 않은 채 돌아갔다고 한다. 문산 종사는 “대종사의 인격에 감화를 받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소태산 대종사는 25세 젊은 나이에 전남 영광에서 깨달음을 얻은 뒤 불법연구회를 세우고, 다시 전북 익산에서 원불교를 열었다. 그 리더십은 과연 어디서 나왔을까, 또 어떤 모습이었을까. 아타원 종사는 이에 대한 일화를 하나 예로 들었다.

“여고에 다닐 때였다. 방학이라 인사를 드리러 왔다. 대종사님이 물으셨다. ‘너, 학교에서 배우고 있는 것이 뭔지 아냐?’ ‘이것 저것 배웁니다’라고 대답했더니 ‘그건 과학이다. 과학만으로 살 수가 없다. 도학(道學)이 바탕이 돼야 세상이 평화로워지는 거다. 비단을 봐라. 비단을 그대로 두면 별로 소용이 없다. 그런데 거기에 수를 놓으면 아름다운 물건이 된다. 도학은 비단이고, 거기에 수를 놓는 게 과학이다.’ 그 말을 듣고 도학과 과학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됐다.”

아타원 종사는 ‘대종사의 리더십’ ‘대종사의 시선’에 대한 이야기도 했다. 학창 시절, 아타원 종사는 성적표를 대종사에게 보여준 적이 있다. 그랬더니 대종사는 칭찬을 하면서도 “너 공부할 때 혼자만 공부하려고 해선 안 된다. 너보다 못한 사람들도 끌어올려야 한다”고 말했다. 아타원 종사는 속으로 ‘아니, 나 혼자 공부하기도 바빠 죽겠는데…’라고 생각했다. 그러자 대종사는 “너 그러면 소용없다. 너만 잘 하려고 하면 소용없다. 다른 사람들을 너보다 더 낫도록 끌어줘야 한다”고 말했다고 했다. 그건 나와 상대를 둘로 보지 말라는 불이(不二)의 시선을 설한 법문이었던 셈이다.

소태산 대종사는 제자들에게 종종 야단을 쳤다고 한다. 그런데 야단을 맞고 종법실을 나오는 제자들의 표정은 얼굴은 늘 밝았다고 한다. 매섭게 야단을 치면서도 동시에 상대의 기운을 북돋아주었기 때문이다. 미워서 그런 게 아니라 사랑으로, 자비로 야단을 쳤기 때문이라고 문산 종사는 설명했다.

소학교를 졸업하고 14세 때 출가한 문산 종사는 대종사의 일상생활도 기억했다. “매일 오전 5시에 종을 치면 원불교 교무들과 똑같이 기상했다. 그리고 겨울에는 2시간, 여름에는 1시간씩 빠짐없이 좌선을 했다. 남폿불을 켜놓고 우리가 좌선하던 방에도 와서 ‘누구는 나왔나?’하며 반드시 안 나온 사람을 챙기셨다. 그 말이 나중에 귀에 들어가면 그 사람이 좌선하러 나올 수 있도록 말이다. 또 청소할 때는 법복을 안 입고 평복을 입고 나오셨다. ‘비를 이렇게 쓸고, 저렇게 쓸어라’고 가르쳤다. 또 출장 때문에 청소에 빠진 사람이 있으면 가서 꼭 그 자리를 쓰셨다.”

대종사는 제자들과 음악도 같이 들었다. 소강당에 축음기를 갖다 놓고 제자들과 함께 ‘춘향가’ ‘심청가’를 들었다고 한다. ‘춘향가’를 들은 뒤에는 “춘향의 절개가 장하다”고 했고, ‘심청가’를 들은 뒤에는 “그 효심이 장하다”고 하며 눈시울이 짠해 약간 슬픔에 잠긴 듯한 표정을 지었다고 한다. 문산 종사는 “우리와 똑같이 생활하셨다. 밥상도 콩나물국, 된장국, 상추쌈을 좋아하셨다”고 말했다.

대종사는 주로 일제강점기에 활동해 일본 경찰의 감시와 압박도 많았다고 한다. 호사카라는 일본 순사가 종법실 근처 툇마루 밑에 숨어서 밤중에 정탐도 했다는 것이다. 문산 종사는 “밤중에 누가 와서 만나는가. 독립운동 지원금이 오가진 않나. 당시 유사종교이던 백백교 사람들이 오가진 않나를 감시했다. 그래서 교무들이 방범대를 구성해 모른 체하고 작대기로 툇마루 밑을 쑤셨다. ‘혹시 도둑놈 여기 있는가 모르겠다’며 말이다. 그렇게 열흘을 했더니 순사가 더 이상 숨어들지 않더라.”

함께 이야기를 듣던 원불교 행정수반 김주원 교정원장은 “5년 후면 원불교가 창교 100주년을 맞는다. 내년 9월이면 원불교 미국 총부가 문을 연다. 원불교의 세계화, 80~90년 전 대종사님께서 이미 말씀하신 거다. 대종사님의 깨달음과 가르침을 세계인이 함께 나누는 날이 오길 바란다”고 말했다.

익산=글·사진 백성호 기자

◆소태산 대종사=원불교의 교조. 본명은 박중빈이다. 1891년 전남 영광에서 태어났다. 1916년 깨달음을 얻고 불법연구회를 만들었다. 1924년 전북 익산으로 활동무대를 옮겨 원불교 간판을 처음 내걸었다. 저축조합과 간척사업도 벌였다. 53세 때 “유는 무로 무는 유로 돌고 돌아 지극하면 유와 무가 구공이나 구공 역시 구족이라”는 게송을 설하고 열반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