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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생태계 변해야 미래 있다 <중> 연구 실적 양보다 질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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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4면

한 연구기관의 자료실에 사이언스·네이처 등 국제학술지가 쌓여 있다. 한국 과학계는 논문 건수 올리기에 치중해 유명 학술지에 인용되는 빈도는 낮은 편이다. [프리랜서 이순재]

한국 과학자들의 국제학술지(SCI) 발표 논문 수가 급증하고 있다. 1998년 1만645편이던 것이 2008년 3만5569편으로 10년 새 세 배가 넘었다. 세계 12위권의 논문 수만 놓고 보면 10위권 초반인 우리나라 경제 규모의 국제적 위상에 걸맞다.

논문의 수준은 어떨까. 논문의 질을 평가하는 척도로, 다른 논문에 인용되는 ‘피인용’ 횟수라는 것이 있다. 한국의 피인용 횟수 세계 순위는 10년간 30위권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2003~2008년 5년간 한 편당 3.3회 인용됐다. 세계 평균 4.6회를 밑돌고, 살 만한 나라의 모임이라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0개 회원국 가운데 하위권이다. 특허 출원과 등록도 크게 늘었지만 활용되지 않는 ‘휴면특허’가 부지기수다.

양적 팽창에 질이 쫓아가지 못하는 것은 한국 과학계가 온통 양적 평가에 치중돼 있기 때문이다. 교수와 과학자의 승진, 인사고과, 연구과제 선정 등에 논문과 특허 수, 연구과제 수주액 등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수치로 개량화할 수 있는 것이 최우선시되고 있다. 이러다 보니 너도 나도 논문과 특허를 양산한다. 그렇지만 논문은 저자 자신을 포함해 누구도 인용하지 않는 것이 수두룩하고, 특허는 관심 갖는 기업이 없어 창고에서 먼지만 쌓인다.

◆부실 논문=서울대가 1999~2008년 SCI에 발표한 논문은 2만8887편. 그중 20%인 5793편은 지난해 4월 현재 단 한 차례도 인용되지 않았다. 서울의 한 대학 교수는 한 대학원생이 석사과정에 들어와 박사까지 받고 해외에서 2년간 박사후 과정을 밟는 동안 그 학생의 지도교수 자격으로 6편의 국제 논문을 공동 발표했다. 그러나 6편을 통틀어 2001년 이후 10년간 단 두 차례 피인용 사례가 있었다.

실적에 급급한 나머지 논문 조작, 중복 게재 등의 물의도 심심찮게 빚어진다. 줄기세포와 관련된 황우석 사태 이후에도 세계 최고 학술지인 사이언스에 발표된 KAIST K교수, 네이처에 발표된 연세대 L교수의 논문이 조작된 것으로 드러났다. 연세대의 또 다른 교수는 국내에서 발표한 논문을 다시 국제 학술지에 중복 게재했다가 들통이 나 사과문까지 게재했다.

◆잠자는 특허=대학과 연구기관이 보유한 특허를 보면 질보다 양에 치중한 감이 짙다. 국책연구소의 경우 쓸데없는 특허의 출원과 유지에 들어가는 막대한 비용이 고스란히 국민세금으로 충당되는 셈이다. 지난해 교육과학기술부의 국정감사 제출 자료에 따르면 한국전기연구원은 3년간 673건의 특허를 출원해 385건이 등록됐다. 등록 후 3년 이상 활용되지 않는 특허는 절반에 가까운 180건에 이른다. 같은 기간 한국건설기술연구원은 511건을 출원해 308건이 등록됐고, 휴면특허는 205건이다. 서울대는 2586건을 출원해 1149건이 등록됐으며, 미활용 특허는 절반이 넘는 639건이다. 이런 현상은 대학과 공공연구소 모두 비슷하다. 국감 자료에 나타난 국내 51개 국책연구소와 대학이 벌어들인 특허기술료는 3년간 총 2650여억원에 불과했다. 미국 노스웨스턴대학이 2008년 한 해 벌어들인 기술료 8억2440만 달러(약 9233억원)의 3분 1도 안 된다. 특히 이 대학이 이를 벌어들이는 데 단지 195개의 특허가 동원됐을 뿐이다. 컬럼비아대학은 34개의 특허로 같은 해 1억3400만 달러(약 1500억원)의 기술료 수입을 올렸다. 특허 출원에 절제가 돋보인다.


◆옥석 가려야=정부의 대응책도 아직 초보적이다. 교과부의 박항식 기초연구정책관은 “양적 성장을 중시하게끔 만드는 평가방법을 개선해야 한다”고 말했다. 중장기적으로 국제 논문 위주의 성과 측정에서 탈피해 국제학회의 초청 강연 실적, 국제학술지 편집위원 경력, 기술 이전 실적 등을 종합적으로 평가하겠다는 것이다.

논문 피인용 건수의 경우도 유력 학술지와 그렇지 못한 학술지로 나누고, 학문 분야도 나눠 가중치를 두는 방향을 검토하고 있다. 지금은 그런 것 없이 건수로만 집계된다. 연구 실패에 대한 제재 규정을 완화해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일본의 경우 실패 과제라는 분류가 없다. 하위 등급의 평가를 받은 연구책임자도 드러나는 불이익은 없다.

글=박방주 과학전문기자
사진=프리랜서 이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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