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시평] 대기업 정책의 딜레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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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경제는 항상 모든 사람을 동시에 만족시켜 주기 어렵다. 누구나 풍요롭게 하는 묘안이 있다면 그만이겠지만 그것은 미지수가 많은 방정식과 같다.

예를 들어 소득이나 기업규모를 모두 동일하게 만든다고 생각해 보자. 이런 형평이 과연 이상적일까. 능력과 재원이 풍부한 기업들은 당장 자유를 달라고 외쳐댈 것이다. 아니면 열심히 뛰어다닐 의욕이 생기겠는가.

그렇다고 시장자율에 맡기는 것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될 수 있는가. 시장은 경쟁력 있는 기업을 길러내는 마력이 있지만, 나름대로의 부작용도 있다. 독점기업이 횡포를 부리거나 국민경제가 소수 재벌에 의존하는 경제력 집중현상도 나타날 수 있다.

따라서 자율과 경쟁을 통해 효율성을 높이는 것도 중요하지만 때로는 시장질서의 실패를 보완하는 정책도 필요하다. 이것이 바로 자유롭고 공정한 경쟁을 촉진하는 공정거래제도의 기반이다.

우리도 1980년부터 이 제도를 도입해 상당한 실적을 거둔 것이 사실이다. 30대 기업집단과 독과점 사업자에 대한 규제의 근간도 여기에서 비롯됐다. 특히 최근엔 재계의 지속적인 반발 속에서도 내부거래를 강력히 규제해 '거래의 공정성' 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그러나 업적 못지 않게 재벌에 대한 규제는 끊임없는 논란의 대상이 돼 왔다. 규제대상이 되는 30대 재벌의 숫자를 줄이자는 주장에서부터 규제 자체를 아예 폐지하자는 논의에 이르기까지 정부와 재계의 공방은 끊이지 않고 있다. 재계는 30대 재벌에 대한 포괄적 규제와 출자제한 등이 기업활동을 지나치게 제약한다고 주장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벌에 대한 국민정서는 아직도 크게 변한 게 없어 개혁을 외쳐온 정부를 곤혹스럽게 만들고 있다. 규제완화가 개혁의 후퇴로 비쳐지는 것도 부담스럽기만 하다.

따라서 재계가 먼저 달라져야 한다는 것이다. 시장환경의 변화와 국민정서, 개혁정책의 사이에서 대기업정책이 딜레마에 빠진 셈이다. 과연 어디까지, 무엇을 풀어주어야 하는가.

우선 30대 재벌의 수를 줄이는 것을 살펴보자. 외환위기 이전에 지정한 30대 기업 중 현재 얼마가 살아있는가. 이미 절반 이상이 쓰러졌거나 정상적인 활동을 못하는 상태에 있다. 또한 30째 재벌의 자산규모는 1위의 20분의1도 되지 않는다.

이렇게 격차가 큰 재벌들을 어떻게 한 범주에 묶어 규제한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몇개를 규제해야 하는가? 이론적인 정답은 없다. 단지 현실적 여건과 타협해야 하는 문제일 뿐이다. 국민정서로는 대폭 줄이는 것이 부담스러울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경쟁해야 하는 세계적인 기업들의 한해 매출액은 한국 전체의 수출액보다 많은 2천억달러 수준이다. 우리가 '크다' 고 판단하는 잣대를 열린 시각으로 보아야 한다.

이렇게 보면 5개도 적지는 않은 것 같다. 지정기준도 자산규모보다는 국내총생산(GDP)의 일정비율 이상으로 정하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숫자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규제완화의 폭이다. 반드시 필요한 규제라면 지정 여부에 관계없이 모든 기업에도 적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기업에 국제규범을 요구하듯이 규제정책도 세계화돼야 한다. 외국 대기업의 계열기업과 국내기업간의 글로벌 경쟁을 고려해 보라.

GM.포드 등은 자동차 못지 않게 금융부문에서 큰 수익을 낸다. 우리 기업은 규제 때문에 불가능한 일이다. 우리 기업에만 불리한 규제가 적용된다면, 무엇인가 달라져야 한다. 경영투명성이나 지배구조가 문제라면 성과에 따라 차별적인 규제를 고려할 수 있다.

그렇다고 정부가 주도해 지배구조평가원을 만들겠다는 구상은 접어두자. 기업은 역시 시장에서 평가받아야 한다.

물론 대기업에 대한 규제를 일부 완화한다고 공정거래제도의 근간이 손상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독점규제와 불공정 거래는 개별기업의 차원에서 앞으로도 더욱 강화돼야 한다.

그러나 형평을 중시하는 포괄적인 규제가 기업의 경쟁력마저 제약한다면 성장의 다이내믹스는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

정갑영 연세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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