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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천하' 음악감독 고병준씨 인터뷰]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8면

'아~아하~어허이아~' .

시청률 1위를 질주 중인 SBS 대하사극 '여인천하' 의 타이틀곡. 안숙선 명창의 애절한 구음(口音)이 흐르는 가운데 테크노 사운드가 그 뒤를 받친다. 여인의 한(恨)을 담은 듯한 구성진 가락이 도전적인 전자음과 맞물려 드라마의 분위기를 고조시킨다. 전통과 현대의 절묘한 만남, 사극에선 보기 드물게 테크노와 국악을 접목한 일명 '퓨전 테크노' 다.

음악감독 고병준(40)씨. '여인천하' 음악의 총 연출자. 원로가수 고(故)고복수.황금심씨의 아들로도 유명한 그는 "사극하면 아쟁.대금을 떠올리는 고정관념을 탈피하고 싶었다" 고 말한다. 일종의 혁명인 셈이다.

지난 11일 밤 11시 서울 중구 신당동의 한 녹음실. 다음주 월.화요일분 '여인천하' 의 배경음악을 녹음하는 작업이 한창이었다. 고씨를 비롯해 음악 디렉터 정동구(45).이필호(39).조진호(32)씨, 기타리스트 정기송(34)씨 등이 대본을 기초로 난상토론을 하고 있다.

그러나 막상 녹음이 시작되자 고씨의 손짓 한번에 바이올린 음이 피아노 소리로, 다시 색소폰 소리로 자유자재로 바뀐다.

고씨는 "기본 테마곡이 8개 있지만 그때그때 상황에 맞는 단상을 담아내고 있다" 며 "그래서 녹음도 미리 하지 않고 하루 이틀 전에 몰아서 한다" 고 말했다. 또한 그는 드라마의 주제를 효과적으로 드러내기 위해 테마음악 모두를 순수 창작곡으로 채웠다.

연주.노래를 하는 데 있어서도 각 분야 최고의 고수들을 모셨다. 가야금 명인인 이화여대 황병기 교수와 인간문화재 안숙선 명창이 처음으로 드라마 음악을 만드는 데 합류했다. 드라마 못지 않게 삽입 음악이 폭발적 인기를 끌고 있는데 바로 이런 노력 덕분이 아닌가 싶다.

최근 출시된 오리지널 사운드 트랙(OST)도 시장에서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그가 이렇게 '여인천하' 의 음악에 남다른 애착을 갖는 이유가 있다. 자신의 이별의 정한이 절절이 녹아 있기 때문이다.

"그대의 삶 속에 내가 있길, 한 순간 일지라도. 한마디 못하고 바라보는 생이별사 내 사랑… " .

난정(강수연 분)을 짝사랑하는 길상(박상민 분)의 마음을 노래한 '생이별사(生離別詞)' 란 곡의 한 대목. 이 노래를 부른 사람은 고씨의 친형인 트로트 가수 고영준(46)씨다.

가수 집안답게 고영준씨의 부인 김영숙씨도 1970년대 중반 유활란이란 예명으로 활동했던 가수였다. 지난해 겨울 암 선고를 받은 김씨는 친구의 빚보증을 잘못 서 4년간이나 완구 행상을 했던 남편이 다시 일어서기를 간절히 바랐다. 남편의 노래는 김씨의 마지막 소원이었다.

고영준씨가 틈틈이 적어놓은 병상 일기가 작사가 한경혜씨에 의해 가사로 되살아났다. 지난 3월초 고영준씨의 생일에 맞춰 녹음이 끝났고, 이미 정신이 혼미해진 채 이 노래를 듣던 김영숙씨의 입가엔 미소가 어렸다고 한다. 그리고 약 한달후 그는 세상을 떠났다.

고병준씨는 또 지난달에는 영원한 정신적 지주였던 어머니 황금심씨와도 이별해야 했다. 이렇게 그는 올해만 5명의 가족.친지를 저 세상으로 떠나 보냈다. 어찌보면 '여인천하' 에 흐르는 애절한 가락은 그의 마음인지도 모르겠다.

지난 11일 고씨는 제 28회 한국방송대상(음악상)수상자로 선정됐다. 그동안 드라마 음악 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서다.

'보고 또 보고' '진실' '애인' '그대 그리고 나' '사과꽃 향기' '사춘기' …. 그리고 현재 방영 중인 SBS '수호천사' 까지. 본인도 다 세지 못하는 수많은 작품이 그의 손을 거쳐갔다.

특히 그는 1999년 MBC '왕초' 에서 국내 처음으로 TV 드라마 음악감독이란 이름으로 자막에 올랐다. 그의 부모가 '남녀 듀엣 가수 1호' '연예인 커플 1호' 라는 기록을 세운 것처럼 그도 '음악감독 1호' 란 역사를 남긴 셈이다.

이런 그가 바라보는 드라마 음악의 길은 어떤 걸까.

"음악적 감성만 있다고 되는 건 아닙니다. 극을 이해하고 주인공들의 마음을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정난정이 되고, 경빈이 될 때 그들의 혼을 담은 드라마 음악이 완성되는 겁니다. " 오

역시 진정한 프로의 길은 쉽지 않은가 보다.

글=이상복, 사진=김진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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