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일기] 욕설로 제 발등 찍는 정치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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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경제학에는 그레셤의 법칙이 있다. '악화(惡貨)가 양화(良貨)를 구축한다' 는 것이다. '잡초를 끊임없이 솎아내지 않으면 나중엔 논이 잡초밭이 된다' 는 농부들의 교훈과 비슷하다.

이 법칙이 기막히게 적용되는 공간이 정치권이다. 목소리 크고, 악 잘쓰고, 막말하는 정치인일수록 속된 말로 '뜨기' 때문이다. '한 건' 을 하면 매스컴을 타 유명해지고, 정치적으로 성장하기도 한다. 그런데 익숙해져서인지 일부 정치인은 막말과 욕설을 겁내지 않는다. 아예 특정 인물과 조직을 집요하게 물어뜯거나 막말하는 것을 자신의 '트레이드 마크' 또는 상품가치로 삼는 듯한 정치인들도 생겨났다.

민주당 안동선(安東善)최고위원은 16일 충북 청주에서 수백명의 당원이 지켜보는 가운데 "남북 이산가족이 만나 다 우는데 딱 두 놈만 눈물을 안흘렸다. 하나는 돌하루방이고 하나는 한나라당 이회창(李會昌)" 이라며 공당의 총재를 '동네 강아지' 처럼 취급했다. 그는 또 "김영삼이라는 돌대가리 대통령" 이라고 표현했다.

아마 安위원은 여러 사람 앞에서 그런 말을 하며 속이 후련해지는 카타르시스를 느꼈을지 모른다. 일종의 배설 쾌감이다. 하지만 그가 모욕한 건 李총재나 金전대통령만이 아니었다.

우선 安위원은 당의 어른인 최고위원의 발언이 그런 수준이라는 것을 만천하에 공개함으로써 민주당을 크게 욕보였다. 安위원 지역구(부천시 원미갑)의 유권자들도 적잖이 실망했을 것이다. 무엇보다 많은 국민들은 정치적 이해관계와 상관없이 심한 모욕감을 느꼈을 것이다.

여당의원뿐만 아니다. 얼마 전 한나라당 김만제(金滿堤)정책위의장은 정부의 경제정책이 "정육점 주인의 심장수술" 이라면서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을 정육점 주인에 비유했다.

이런 식의 발언들은 말하는 사람이나 일부 듣는 사람들의 말초적인 속풀이에 도움될지는 모른다. 하지만 그로 인해 정치판 전체는 더 망가져왔다. 실제로 민주당 安위원의 발언이 나오자 한나라당은 "영수회담을 하지 말자는 뜻 아니냐" 며 맹렬히 반발하고 있다.

후배들의 일탈을 말려야 할 중견 정치인들이 거꾸로 막말 정치에 앞장서는 최근의 정치현실은 정말 심각하다. 안그래도 국민들의 마음은 멍들어 있다. 더 이상 상대방의 감정을 자극하는 데만 열중하다간 국민들이 정치권에 막말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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