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를 말한다] 1953년 7월 철원전투 최전방 사수, 권길성(81)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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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나는 지난 57년을 가슴 속에 맺혀 있는 한(恨)과 함께 살아왔다. 1953년 7월 14일 밤에 벌어졌던 일 때문이다. 나는 그때의 격전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당시 캄캄한 밤에 최전방 고지로 개미떼같이 몰려오는 중공군의 공세 앞에서 나는 목숨을 걸고 싸웠다.

병력 증원을 요청하러 나갔던 분대장은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고립된 채 우리 분대원 몇 명은 끝까지 싸우다가 대부분 목숨을 잃었다. 그런데 나와 같은 분대원이었던 ‘엄 일병’은 그만 내가 그를 적으로 오인해 던진 수류탄에 젊음을 꺾고 말았다. 내 가슴의 응어리다.”

권길성씨가 1953년 국군 6사단 최전방 고지에서 벌인 혈투를 회상하고 있다. 배경 사진은 당시 강원도 철원 지역 전투에 참가한 적군 중공군의 후방 부대가 탄약과 식량 등을 일선 부대에 공급하기 위해 산을 기어오르는 모습. [조용철 기자], [자료사진=중국 해방군 화보사]

적은 몰려오고, 증원 요청을 위해 후방으로 간 분대장은 돌아오지 않았다. 어둠을 타고 몰려오는 중공군을 향해 수류탄을 던지고 또 던졌다. 몸과 몸이 부딪치는 육박전도 벌였다. 소대원들은 거의 전멸했다. 1953년 7월 14일 밤 국군 6사단의 최전방 고지에서 끝까지 혈투를 벌였던 권길성(81)씨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적으로 오인해 폭살한 전우의 유해를 직접 수습하는 게 노병의 마지막 소원이라고 했다.


사건이 벌어진 곳은 국군 6사단 19연대 2대대 7중대의 최전방 고지. 강원도 철원에서 능선으로 죽 연결되는 이른바 ‘김일성 고지’를 코앞에 둔 곳이다. 6·25전쟁 휴전 직전에 벌어진 중공군의 대공세가 마지막으로 이곳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30만 병력을 쏟아부은 중공군의 공세는 평소처럼 어두운 밤을 타고 시작됐다. 내가 지키고 있던 곳은 사주방어(四周防禦)형 고립진지였다. 날씨는 적의 침공을 관측하는 기준이었다. 그날도 구름이 낮게 깔리고 달이 뜨지 않는 어두운 밤이었다. 나는 초소 근무를 하고 있었다. 누군가가 어둠을 헤치며 다가오고 있었다. “지금 적군이 공격을 시작했다.” 소대 본부에서 나온 전령이었다. 전령은 취침호(就寢壕)에서 자고 있던 부대원들을 깨워 전투 위치에 서게 했다.

적의 공세는 치열했다. 어느덧 총격에 맞아 사망한 동료가 치워지면서 나는 계속 앞의 참호로 자리를 옮기고 있었다. 나는 로켓포 사수였다. 처음에 방어를 시작한 곳은 진지 최후방. 그러나 앞의 동료가 사망하면서 내 위치는 진지 전방 쪽으로 밀려나가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가 “더 앞으로 나가라”면서 등을 떼밀었다. 그는 내가 갖고 있던 카빈 소총까지 회수했다. 앞에서 사망한 동료의 무기를 사용하라는 뜻이었던가 보다. 나는 그저 기관포 탄통에 담아둔 10여 발의 수류탄을 통째로 들고 어둠 속으로 나아갔다.

진지의 전방 벽이 무너진 틈으로 누군가 올라왔다. ‘번쩍’ 하면서 조명탄이 터졌다. 적군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적은 다행히도 어둠에 가려져 있던 나를 보지 못했다. 적군 앞으로 수류탄을 굴려 폭살했다. 중공군은 아군 진지의 가장 높은 곳에 있는 기관포 참호를 폭파하려고 여러 곳으로 기어오르고 있었다. 그 순간, 참호 벽에 붙어 오르던 중공군이 다시 조명탄에 노출됐다. 그러나 나와 너무 가까운 곳에 있었다. 너무 급박한 나는 수류탄을 쥐고 있던 오른손으로 적의 얼굴을 후려 찍었다. 약간 미끄러져 내려간 적군의 몸 위에 그 수류탄을 던졌다. 그렇게 수류탄으로 처치한 적만 해도 4~5명이었다.

그러나 아군 진지 높은 곳에서 울리던 기관포 소리가 멎었다. 적에게 점령당한 것으로 판단했다. 진지 최후방 쪽으로 움직여 후퇴를 할 때 내 무기였던 로켓포를 가지고 나가야 한다는 생각이 갑자기 들었다. 원래 내가 있던 곳으로 움직일 때 인기척이 났다. 상대가 아군인지 적군인지 분간하기 힘들었다. 그 뒤로 섬광이 번쩍였다. 그 순간 내 눈에 들어온 상대는 ‘까까머리’였다. 중공군은 대개 이 머리 모양이었다. 폭탄을 던졌다. 폭발음이 터지고 인기척은 없었다. 중공군이 가지고 있던 따발총을 노획해서 후퇴하자는 생각에 그쪽으로 갔다. 상대는 엎어져 있었다. 그를 돌아 눕혔다. “나 좀 살려 줘-.” 그 입에서 나오는 신음은 한국말이었다. “배가 고파…, 아이고…살려 줘….” 정신이 아득했다. 내 동료에게 수류탄을 던진 것이었다.

코를 바짝 들이대다시피 해서 확인해 보니까 그는 무반동포 탄약수였던 ‘엄 일병’이었다. 우선 어깻죽지부터 흘러내려오는 피를 지혈했다. 그러나 그는 곧 숨이 멎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엄 일병은 전투가 있기 얼마 전 사단 교육대에 교육을 받으러 갔다가 머리를 깎았다고 했다. 나는 머리 모양으로 엄 일병을 적으로 오인했던 것이다. 진지 밑으로 몸을 굴려 내린 뒤 나는 아군이 지키고 있던 주 저항선으로 힘껏 내달렸다. 멀리 먼동이 트고 있었다.

내가 겪은 이 전투는 13일 동안 중공군에 밀리다가 공세를 막아 지금의 철원 지역을 건진 값진 싸움이다. 나는 이 전투에서 희생당한 여러 용사들과 함께 ‘엄 일병’의 넋을 다시 위로하고 싶어 중앙일보 지면을 빌리고자 했다.

당시 부끄러운 국군의 이야기지만, 내가 참전한 김화 전투가 시작될 무렵 우리 분대의 분대장은 증원 병력을 끌고 온다면서 전선을 빠져나갔다. 나중에 그 분대장이 전선에 복귀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분통이 터질 수밖에 없었다. 증원 병력을 데리고 온 것도 아니요, 전선에 복귀해 부대원과 생사를 함께한 것도 아니었다. 쉽게 말하자면 전선의 부하들을 내팽개치고 도주한 셈이다.

어찌 된 영문인지는 모르겠으나 그 분대장은 나중에 훈장까지 탔다고 했다. 나는 이 점을 다시 밝히고자 노력했으나 여의치 않았다. 분대장의 책임을 다시 묻고 싶은 마음 간절하다. 어이없이 동료의 손에 죽어간 엄 일병의 희생이 조금이나마 위로를 받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다. 60년 가까이 흘러간 세월로 인해 그 진상을 밝히기 어렵다면, 살아 있는 전우들과 다시 만나 당시 처참하게 싸우다 목숨을 잃은 전사자들을 추모하고 싶다. 그 숱한 세월 동안 땅속에 묻혀 있던 엄 일병의 고혼(孤魂)을 달래기 위해 그의 유해를 내 손으로 직접 수습하는 게 내 마지막 소원이다.

사진=조용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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