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과감한 투자로 장애인과 더불어 사는 사회를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8면

올해 밴쿠버 겨울 장애인올림픽에서 감동의 은메달을 따낸 휠체어 컬링 대표팀 주장 김학성씨는 20대 초반에 산업재해로 다리를 다쳐 장애인이 됐다. 팀의 막내 김명진씨도 10대 후반에 교통사고로 장애가 생겼다. 한국 여자선수 중 최초로 크로스컨트리 경기를 완주해낸 서보라미씨 역시 고3때 계단에서 굴러 하반신 마비가 됐다. 우리나라엔 장애를 안고 태어난 사람보단 이들처럼 평범하게 살다 불의의 사고나 질병으로 장애인이 된 경우가 훨씬 많다. 장애를 남의 일로 치부할 수 없는 건 그래서다.

그럼에도 우리 사회엔 여전히 장애인에 대한 편견과 차별이 적지 않다. 오죽하면 서 선수가 “장애물투성이인 제 인생보단 두 팔로 눈밭을 헤쳐나가야 하는 크로스컨트리가 쉽다”고 했을까. 그럼에도 그들은 꿈을 잃지 않고 온갖 난관을 극복해가며 전력을 다해 운동에 매달렸다. 꿈을 잃는 순간 살아갈 의미도 잃게 됨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장애인들이 꿈을 키우는 데 장애가 너무 많은 게 우리 현실이다. 2008년 최영씨는 시각장애인 최초로 사법시험에 합격했지만 사법연수원에 장애인용 학습시설이 갖춰져 있지 않아 입소를 미뤄야 했다. ‘한국의 스티븐 호킹’ 이상묵 서울대 교수가 전신마비 장애를 딛고 강의할 수 있게 도와주는 헤드 마우스, 가수 강원래씨가 벌떡 일어선 채 무대에서 공연을 펼치게 해주는 기립형 전동휠체어도 많은 장애인에겐 그림의 떡일 뿐이다. 과학과 의료 기술의 발달로 장애인의 자립을 가능케 하는 보조기구들이 많이 개발됐지만 가격이 너무 비싼 탓이다. 여타 선진국에선 거의 모든 보조기구를 국가나 사회보험이 지원하는 반면 우린 전적으로 개인 부담이다.

장애인의 꿈을 키워주기 위한 인프라 구축엔 적잖은 돈이 들어간다. 그러나 그건 내 이웃, 내 가족, 아니 궁극적으론 우리 개개인을 위한 투자라 할 수 있다. 선진국형 ‘더불어 사는 사회’를 가꾸기 위해서도 필요하다. 그런데도 우리의 장애인 복지예산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중 최저 수준이다. 낯부끄러운 일이다. 지금처럼 장애인으로 살기가 너무 힘겨워 이민을 고려해야 하는 나라라면 국격(國格)을 논할 자격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