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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마고도는 차와 말의 교역로 … 비단길보다 역사 길어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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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호 20면

인디언 복장으로 위장한 보스턴 시민들이 차 상자를 바다에 내던지면서 일어난 보스턴 차 사건이 미국 독립전쟁의 기폭제가 됐다.

차의 기원은 신농씨(神農氏)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중국에서 농경의 신으로 추앙받는 그가 산천을 넘나들어 목이 마른 순간 홀연 떨어지는 나뭇잎을 손으로 비벼 즙을 먹으니 갈증이 가셨다고 한다. 이 전설이 사실이라면 차 문화는 기원전 5000년쯤부터 시작됐다. 처음에는 기호상품이 아니라 약용이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사실과 허구 사이를 오가는 전설을 빼면 차(茶)라는 말이 인간의 기록에 등장한 때는 기원전 3000년께다. 중국의 가장 오래된 사서 『이아(爾雅)』에는 차를 의미하는 한자 ‘茶(다)’를 떠올리게 하는 문자가 등장한다. 차 마시기를 즐긴 인물이 역사서에 등장한 시기는 기원전 59년이다. 전한 시대 명문장가인 왕포가 차를 다루는 노비를 사들인 기록이 남아 있다. 이렇게 시작된 차는 인간 역사에 지워지지 않는 흔적을 남겼다.

차 한 잔에 담긴 인류의 역사

오래된 무역 네트워크
차마고도(茶馬古道·Ancient Tea Route)는 차의 고향 중국 윈난성과 쓰촨성에서 시작돼 티베트와 인도·파키스탄을 연결하는 길이다. 길이가 약 5000㎞에 이른다. 티베트의 말과 중국의 차가 이 길을 타고 이동했다. 차마고도는 중국 한무제 시절(기원전 141~87년)에 처음 개척된 비단길보다 빨리 열렸다고 한다. 활성화된 시기는 당나라 시대였지만 전문가들은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무역 네트워크라고 부른다.

차마고도는 원격지 무역로다. 히말라야산맥 등 험준한 지형을 뚫고 무역이 이뤄졌다. 갑작스러운 기상 변화나 산적떼 습격 등 리스크가 컸다. 합리적인 이윤보다는 희소가치를 바탕으로 한 엄청난 차익(초과이윤)이 인정될 수밖에 없었다. 고위험·고수익 상품이었던 셈이다. 초과이윤은 이른바 ‘국산화 욕망’을 불러일으킨다. 상대의 엄청난 이윤을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해 자국에서 물건을 생산해 내려 한다는 것이다. 바로 이 욕망 때문에 차나무가 고향인 중국 윈난성을 떠나 인도 등으로 퍼져 나갔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인도의 차 전문가인 TK 몬달은 “차마고도를 통해 차가 핵심 교역품으로 등장한 이후 수많은 발명과 갈등·변화의 원인으로 구실했다”고 말했다.

탄생의 촉매
차를 교역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리스크 때문에 현대 자본주의 핵심 장치가 본격화됐다. 바로 주식회사다. 최초의 주식회사는 1600년에 등장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다.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주식을 발행해 원격지 교역자금을 마련했다. 주식회사 체제에서 투자자들은 여차하면 투자한 한도 안에서 손해를 보면 그만이었다(유한책임). 네덜란드는 주식회사 형태인 동인도회사 덕분에 원격지 무역경쟁에서 포르투갈을 누를 수 있었다. 주식이라는 장치 덕분에 동인도회사는 포르투갈 사람들이 엄두도 내지 못했던 고위험 사업을 대규모로 벌일 수 있었다.

동인도회사는 대형 차무역 선단을 꾸렸다. 심지어 주식을 팔아 조달한 자금을 활용해 자체 조선소까지 갖췄다. 동인도회사는 배들을 중국 등으로 보내 차를 대량으로 수입했다. 동물에 의존해 이뤄지던 차 교역(차마고도)이 거대한 해상 무역으로 발전한 셈이다. 차 수요는 충분했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탄생한 1600년 전후 프랑스와 네덜란드 상류층 사이에서는 차 마시기 열풍이 불었다. 단순한 기호품이 아니었다. 그 시절 유럽 귀족들은 차를 만병통치약쯤으로 여겼다.

동인도회사는 중국 등에서 차를 수입해 폭리에 가까운 이윤을 붙여 팔았다. 동인도회사의 차 판매 지역은 유럽만이 아니었다. 중국 등에서 차를 수입해 북미 지역에 팔기도 했다. 물론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순전히 차만을 수입해 팔지는 않았다. 도자기와 비단, 향료 등도 수입했다. 하지만 동인도회사의 핵심 교역품은 차였다.

독립전쟁의 방아쇠
차 교역의 주도권은 18세기 들어 네덜란드에서 영국으로 넘어갔다. 교역의 주역은 네덜란드 주식회사 열풍에 영향 받아 설립된 ‘영국 동인도회사’였다. 이 회사는 1760년대 영국 의회에 로비해 중국과 인도 등에서 수입한 차를 미국 등 영국 식민지에도 팔 수 있는 면허를 받았다. 애초 런던 지역에서만 판매할 수 있었으나 불황으로 수요가 줄자 판로를 식민지로 확대한 것이다. 당시 미국에는 영국 정부의 관세를 피해 차를 밀수하는 업자들이 많았다. 이들은 대형 주식회사인 영국 동인도회사가 상대적으로 싸게 수입한 차가 미국에 팔리면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다 영국 정부가 식민지에도 세금을 물리기로 결정했다. 식민지 미국 주민들의 불만이 달아오르고 있었다. 계기만 있으면 폭발할 듯했다.

이런 때 차 밀수업자 존 핸쿡 등이 주축이 된 보스턴 과격파 주민들이 인디언 복장을 하고 1773년 12월 16일 항구에 정박된 동인도회사 배에 올라 차를 바다에 던져 버린 사건이 일어났다. 이른바 보스턴 차 사건의 시작이다. 이후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진행됐다. 대륙회의가 이어지고 1776년 독립이 선언됐다. 차가 현존 최강대국 탄생을 자극한 셈이다.

서세동점(西勢東漸)의 도화선
영국 정부는 18세기 중반까지 차에 120%에 가까운 세금을 물렸다. 차가 귀하고 비싸 영국 서민들은 마실 엄두를 내지 못했다. 밀수가 급증했다. 결국 영국 정부는 18세기 말 차에 대한 관세를 인하했다. 서민들이 본격적으로 차를 마시기 시작하면서 중국에 대한 무역적자가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당시 중국 무역 독점권을 가진 영국 동인도회사는 인도산 아편을 중국에 팔아 무역적자를 메웠다. 중국인 아편 중독이 늘면서 1830년대엔 중국이 무역적자를 기록하기 시작했다. 중국 정부는 대응에 나섰다. 아편 사용을 단속하기 시작했다. 이게 발단이 돼 1840년 아편전쟁이 벌어졌다(1차 아편전쟁). 1842년까지 이어진 전쟁에서 중국이 졌다. 베른조약을 맺고 홍콩을 영국에 넘겨주고 광둥 등 5개 항구를 개항했다. 거대한 제국 청나라 몰락의 서막이었다.

1차 아편전쟁이 발발한 지 10여 년 뒤인 1854년 미국 매슈 페리 제독이 이끈 함대가 일본의 빗장을 열었다. 여러 가지 물품을 교역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당시 페리 제독이 가장 큰 관심을 보인 품목은 바로 일본의 차였다. 그는 포르투갈 상인들을 통해 일본 차를 알고 있었다. 차의 마력이 중국에 이어 일본의 개항을 이끌어 냈다. 수세기 동안 동양을 살찌게 했던 차가 서양 세력을 유인하는 화근이 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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