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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증맞은 분홍빛, 입보다 눈이 즐거워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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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호 09면

‘그윽하다’ 이 말을 입으로 소리 내 발음해 본 적이 언제던가. 기억도 가물가물하다. 책에 쓰인 글자로 보기만 하는 어휘가 참 많은데, ‘그윽하다’라는 말도 이제 그런 종류의 말이 되었다. 이토록 쓰지도 않던 ‘그윽하다’란 말을 다시 머릿속에서 떠올려 입으로 발음하도록 한 것은 몇년 전 이천 옛집 마당에 핀 매화였다. 묘목보다 조금 큰 어린 나무를 사다 심은 지 십 년이나 됐을까. 그간 하도 꽃이 안 피어, 이 나무는 그저 그러려니 체념하고 있었는데, 나이를 먹을 만큼 먹으니 조금씩 꽃이 피더니 재작년부터는 장하게 매화꽃을 피웠다. 나무가 꽃을 피운다는 것이 세월이 필요하다는 너무도 당연한 사실을 깨닫는 데도 꽤 시간이 필요했던 셈이다.

이영미의 제철 밥상 차리기<5> 그윽한 매화차와 진달래 화전(花煎)

산수유 꽃이 시들어 빛을 잃은 시점에서 화려하게 피어 오른 매화는 정말 품격 있었다. 사람을 홀리게 만들 정도로 화사한 벚꽃, 잎과 꽃이 함께 어우러져 정겨운 자두꽃, 그리고 여섯 살배기 ‘핑크공주’들의 옷 색깔처럼 야사시하게 화려한 복숭아꽃, 이런 것들과 비교할 수 없는 품격이 매화꽃에는 있다. 그 품격의 핵심은 단연 향기다. 엇비슷한 봄의 과일 꽃들 가운데에 이 정도 품격에 비할 수 있는 것은, 보름달 달빛 아래에서 보는 배꽃 정도라고나 할까.

매화 향이 집 주변에 퍼져나가니 입에서 절로 ‘그윽하다’라는 말이 나왔다. 그러고서야 드디어 이육사의 ‘광야’의 한 구절의 의미를 확신했다. ‘이제 눈 내리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라는 구절에서 ‘아득하니’의 의미를 ‘아득하게 멀다’의 의미로 해석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었다. 아직 매화가 피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본다면 ‘홀로’란 말이 이상하지 않은가. 이 구절에서 ‘아득하니’는 눈 속에서도 매화가 홀로 피어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로 그 품격 높은 향을 내뿜고 있다는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옳다. 정말 그 향은 그윽하고 아득하다.

그래서 바구니를 들고 매화꽃을 따서 말리기로 했다. 약간 덜 핀 봉오리를 따서 널어놓으니, 건조한 봄 공기에 잘 말랐다. 그리고 몇 주 뒤, 매화꽃이 모두 진 후에, 말린 매화를 따뜻한 물에 우려 맛보았다. “와아!” 하는 감탄이 터져 나왔다. 향이 그대로 살아있었다.

이 맛에 봄에는 꽃차를 찾게 되나보다. 꽃이 눈과 코를 뒤흔들어 놓으니, 입에서도 꽃을 원하는 것이다. 차의 주류는 차나무 잎으로 만든 것이지만 봄과 가을, 마음이 묘하게 요동칠 때에는 맛보다는 향으로 승부하는 꽃차를 찾게 된다. 그것도 계절에 맞춰, 가을에는 국화차가 먹고 싶고, 봄에는 매화차와 찔레꽃차 같은 봄꽃을 맛보고 싶다.

꽃차 전문 인터넷사이트에는 벌써, 올해 따서 말린 매화차 햇것이 나와 있다. 서울 부근에서는 이제야 매화꽃이 피지만, 남쪽에서는 3월 중순에 피었기 때문이다. 이런 꽃차는 다관을 쓰지 않고 찻잔에 그대로 띄우거나 속이 비치는 유리 포트에서 우려야 제 맛이다. 따뜻한 물에 담겨 꽃잎이 서서히 피어나며 바알간 수술을 드러내는 매화를 보는 흥취가 있다. 눈으로 먼저 즐기고 다음에 향을 즐기고, 입으로 마시는 것은 그 다음 순서다.

이런 꽃차에 어울릴 법한 봄의 간식은 진달래 화전(花煎)이다. ‘얼씨구 야야 지화자 내 사랑 가노라’ 하는 민요 ‘화전가’를 떠올리고 음력 3월 3일인 삼짇날 동네 부녀자들이 모두 모여 화전놀이를 갔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이 화전이라는 음식이 매우 궁금해서 견딜 수 없었다. 진달래꽃을 붙여 기름에 지진 찹쌀전병이라는데, 그걸 꼭 해보고 싶어졌다. 결국 동네 야산에 올라가서 깨끗한 진달래꽃을 딱 10송이 정도 땄다. 재미로 하는 음식인데 이 예쁜 꽃을 아깝게 많이 딸 필요야 없지 않은가. 마른 가지에 피어 오른 진달래가 하도 애처로워서 미안해서 많이 딸 수도 없다.

진달래를 철쭉과 혼동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진달래는 잎이 나오기 전에 꽃부터 피고, 철쭉이나 영산홍 종류는 잎이 나오고 난 후에 꽃이 핀다. 진달래꽃은 흐드러지는 느낌이 강해 야산에나 어울리는 꽃이라면 철쭉꽃은 화분에 심어놓아도 어울릴 정도로 아주 단정하다. 진달래는 먹을 수 있지만 철쭉꽃은 독성이 있다고 하니, 헷갈리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개화 시기도 다르다.

철쭉이 4월 말과 5월 초에 핀다면, 진달래는 4월 초부터 중순에 만개한다. 바로 50년 전에 이 땅 최초의 시민혁명인 4·19가 일어난 그날, 해마다 이때쯤 진달래꽃은 만개한다. 시조시인 이영도의 시구에서처럼 ‘맺혔던 한이 터지듯 여울여울 붉은 젊음 같은 꽃사태’가 바로 진달래 피는 모습이다.

처음 만들어본 진달래 화전은 실패였다. 찹쌀가루를 물에 반죽하여 동글납작하게 만들어 지진 것까지는 좋았는데, 꽃을 예쁘게 붙이고 난 뒤 기름에 지지니 꽃잎 부분이 뜨거운 팬에 닿자마자 색깔이 갈색으로 변해 버렸다. 어떻게 해야 하나 궁리한 끝에 생각해 낸 방법은 꽃잎을 나중에 붙이는 것이다. 우선 찹쌀반죽을 팬에 놓고 한 면을 어느 정도 익힌 뒤 뒤집어서 꽃잎을 붙인다. 그러고는 불을 줄이고 은근한 열기로 속까지 익히는 것이다. 재료가 찹쌀이므로 이런 방식으로 해도 충분히 속까지 잘 익는다.

단지 시간이 좀 걸린다는 게 단점이다. 그래도 어차피 모양으로 승부하는 음식이니 어쩔 수 없다. 빨간 진달래꽃 옆에 앙증맞은 쑥잎을 붙여 장식해도 예쁘다. 다 익은 화전은 조청에 찍어 먹는다.

짐작했다시피 화전은 혀보다는 눈이 즐거운 음식이다. 꽃은 아무 맛이 없으니, 그저 찹쌀전병 맛일 뿐이다. 매화차가 눈과 코가 즐거운 차인 것처럼 화전도 그런 떡이다. 늘 이렇게 호사를 떨 수는 없겠지만, 공기의 냄새가 달라진 이 봄에 한 번쯤은 이런 호사를 누려도 괜찮지 않을까.


대중예술평론가. 요리 에세이 『팔방미인 이영미의 참하고 소박한 우리 밥상 이야기』와 『광화문 연가』 『한국인의 자화상, 드라마』 등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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