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비밀 강박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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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원래 꿈은 비행기 조종사였다. 레닌그라드에 있는 민간항공대학에 진학하려고 진지하게 고민한 적도 있다고 한다.

소련 첩보기관인 국가보안위원회(KGB)에 들어가기로 결심한 결정적인 계기는 '창과 방패' 라는 첩보영화였다고 푸틴은 술회했다. "전군(全軍)도 하지 못하는 일을 첩보원 한 사람이 해낸다는 점이 인상깊었다.

'첩보원 하나가 수천명의 운명을 결정한다' 는 말을 이해할 것 같았다. 민간항공대학에는 더 이상 관심이 없어졌다" 는 것이다. 대학 전공으로 법학을 선택한 것도 KGB 요원이 되는 데 유리하다는 이유에서였다.

젊은 시절의 푸틴은 지나칠 정도로 용감했던 듯하다. "첩보아카데미에서 훈련받을 때 '위험불감증' 이 나의 단점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아주 심각한 결점이었다. 나는 오랫동안 이를 치료하려고 노력했다" 고 그는 자서전(『제1인자』)에서 털어놓았다.

첩보원에게 위험불감증 이상으로 치명적인 것이 '보안불감증' 이다. 당연히 푸틴도 보안의식은 철저했겠지만, 스튜어디스 출신인 부인 류드밀라 푸티나와 연애할 때만은 예외였던 모양이다. 만난 지 사흘 만에 류드밀라 푸티나에게 집 전화번호를 알려주었다가 친구로부터 "돌았구나" 는 말을 들었다고 하니까.

지난 2월 푸틴 대통령 방한 때의 삼엄한 경호작전이라든가, 서울 정동의 옛 배재고 부지에 신축 중인 '스텔스형(型)' 러시아대사관에는 첩보기관 출신 지도자의 남다른 조심성이 배어 있을 것이다.

그렇더라도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이번 러시아 방문길에 보여준 비밀주의에는 푸틴 대통령도 두손 들지 않았을까 싶다. '스텔스 익스프레스(stealth express.보이지 않는 급행열차)' 라는 뉴욕 타임스의 묘사가 전혀 어색하지 않다.

유럽쪽 신문들의 시각은 좀더 신랄하다. 벨기에 일간지는 "金위원장의 비밀스런 여행은 현대적인 러시아의 이미지를 오염시켰다" 고 했고, 한 프랑스 신문은 "스탈린에 관한 옛날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다" 며 '구세대 비밀강박증(强迫症)' 이란 표현까지 썼다.

'어떤 생각이 의식에 달라붙어, 버리려 할수록 더 생각나는 상태' 가 강박증이다. 푸틴은 KGB 출신인데도 사유재산 몰수를 주장하는 공산당을 '바퀴벌레' 라며 비웃었다. 공산혁명 지도자 레닌의 묘를 소련 붕괴 후 외국원수로는 처음으로 참배한 金위원장의 소감이 궁금하다.

노재현 정치부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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