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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은의 세상월령가 11월] 살아있는 지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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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 이종구 작 ‘국토-고산자를 생각하며’, 74×57㎝, 종이에 파스텔, 2004

아직도 단풍이다. 조선의 온 산야를 샅샅이 돌아보며 지도를 만들어간 고산자의 숭고한 생애가 있다.

그의 한 걸음 한 걸음을 누가 시늉하랴. 가시덤불도 빙판 진 마루턱 바위너설도 벼랑 끝도 피하지 않았다. 비바람에도 가는 길 그만두지 않았다.

저 단군신화의 곰과 범이 나타나는 으슥한 두메도 왈짜들이 눈 부릅뜬 동구 밖도 푸대접밖에 대접할 것이 없는 저잣거리 인심도 무릅쓰고 가고 또 갔다.

하나의 벅찬 사명은 이리도 비장했다. 백두산 천지까지 혼자서 여러 번 올라갔다. 올라가 16봉 둘레를 다시 재고 높이도 새로 가늠했다. 이렇게 한 군데를 몇 번씩 찾은 적이 어찌 한두 번이던가.

금강산에서는 방랑시인 김삿갓을 만났다. 외금강 구룡연 물 속에 버드나무 껍질을 드리웠다. 그 일을 김삿갓이 서툴게 거들었다. 그 구룡연 깊이 9척이던가.

그가 돌아다니며 그려낸 것을 정성껏 목판에 새긴다. 그것을 단색으로 찍어내면 지도 조각이 된다. 그 조각을 맞추면 한반도 전도가 되는 것이다. 제주도와 울릉도도 따로 어엿하다.

대동여지도 판각본은 그러므로 각 지도 조각 22점을 맞춰 펼친 16만분의 1 지도다.

그는 이 필생의 노작을 완성하기에 앞서 진작 청구도를 제작한 바 있다. 그것을 만들기 위한 답사 기간과 판각 기간도 어지간히 길었다. 하지만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다시 27년이란 세월을 새로 답사 실측하는 데 바쳐야 했다. 대동여지도의 완성은 실로 이러한 산야 순례의 일편단심 없이는 불가능했다.

목숨을 잃을 뻔한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병이 나서 바위굴 속에서 몸 떨며 신음했고 모진 배고픔에도 이골이 났다. 잠자리 없는 나무 밑 맨바닥에 풀 깔고 보내는 밤이 길었다. 두고 온 처자에 대한 가책과 그리움 또한 절절했다. 이런 삶의 정처없음도 그의 국토 인문지리에의 꿈을 단념시키지 못했다.

무엇보다 대동여지도의 장점은 그 정확성이 근대지도와 거의 차이가 나지 않는 데 있다. 근대지도의 제작과는 달리 혼자서 산전수전의 세월로 강토의 방방곡곡을 찾아다니는 고행이 만들어낸 지도야말로 살아있는 지도인 것이다.

그의 일은 답사와 실측으로 끝나지 않는다. 차라리 거기에서 일은 다시 시작된다고 하겠다. 다닌 곳들을 일일이 정리하고 그려내는 작업이 있어야 한다. 또 그것을 판각 인쇄하는 작업이 뒤따라야 한다. 누가 공공연히 지원해 주지도 않았다. 미쳤다는 말, 홱 돌아버렸다는 말을 듣는 것이 그의 집념에 대한 주변의 관심이었다.

드디어 한 벌의 지도가 펼쳐졌을 때 그의 감회는 만 갈래의 그것이었으리라.

그 지도는 행정.군사.경제.사회 그리고 문화의 기본이며 무엇보다 자연과 인간의 삶을 영위하는 무대의 총체적 재현이었다. 그 지도를 그는 국태공 대원군에게 바쳤다.

처음에는 경이의 대상이었다. 탄복했다. 그러나 조정의 막힌 눈에는 그것이 나라의 천기를 누설하는 역적의 대상이었다. 그는 하루아침에 국가 보안을 해치는 죄수로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아니 그곳에서 끝내 죽어가는 신세가 되었다.

이 비극은 사실이 아니라는 주장이 나와 있다. 일제 식민지사관을 조작하는 과정에서 일본인 사학자가 조선 말기의 정부를 폄하하기 위한 사례로 대동여지도 수난을 내세웠다 한다. 일본인 사학자라면 총독부 조선사편수 총책 이마니시(今西)가 아니었을까. 그의 조선인 제자 이병도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을까.

아무튼 고산자는 대동여지도를 남긴 직후 세상을 떠난 것이 사실이다.

사실인즉 대동여지도는 근대지도에 대한 전근대지도라고 규정할 수 없게 근대적인 지도의식이 높다. 한국의 근대지도가 식민지시대의 산물이라면 그것에 앞서 만들어진 대동여지도야말로 한국의 자생적 근대성을 당당하게 반영하고 있는지 모른다.

고산자의 발자취로 하여금 산하는 그 자연의 미개상태로부터 하나의 명예로운 인문지리로 전환한다. 이는 동아시아 고대 근원사상인 천.지.인 3재(三才)의 하나에 공헌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지도를 만드는 일은 인간으로 하여금 자연을 정복하고 환경을 도구화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천문과 지리 그리고 인간의 가치가 함께 어우러지는 궁극의 목적에 닿아있는 것이다.

나는 한반도 상황이 흉흉할 때나 그렇지 않을 때나 대동여지도 축쇄판 영인본을 꺼내어 본다. 거기서 고산자의 숨소리를 듣고 그의 뒷모습을 떠올린다. 그의 짚신감발의 발바닥은 차라리 산짐승의 발바닥이 다 되었을 것이다.

고려는 몽고의 침략을 이겨내기 위해 병기를 만드는 대신 대장경 판각 한 자 한 자를 새기는 신앙을 지향했다. 근대인의 사고로는 이해되지 않는 주술의 세계이기도 하다. 그것이 당대의 난국을 어떻게 헤쳐나가는 힘이 되어 나라를 가호한 일 말고 후손에게는 세계가 함께 자랑하는 문화유산을 남겨주고 있는 것이다.

대동여지도도 그것이 만들어지기까지의 고난으로 하여금 오늘날 겨레의 넋과 문화를 압축한 생생한 지형이 되고 있다. 그래서 이 지도를 들여다보면 오늘이 오늘의 한계에 그치지 않고 오늘보다 더 나은 내일의 시작임을 깨닫는다.

지난 시절 격리된 옥방에서 달마 면벽으로 지내던 어느날 고산자의 지도가 벽에 붙어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했더니 그날 밤 고산자가 삼천리 강산 어느 고개를 허위허위 넘어가는 꿈을 꾼 적이 있다. 그 꿈을 한번 더 꾸고 싶었다.

산과 하천, 뭍에서 떨어져나간 섬들과 당시의 역참. 창고.봉수대.산성 그리고 인체의 핏줄 같은 도로망의 표시나 거리 수치 등의 그 지도를 보고 있노라면 마치 나 자신이 그 지점들을 다니고 있는 듯한 실감을 불러일으킨다. 그래서 대동여지도가 표의문자라면 근대지도는 표음문자에 해당하겠다.

내가 처음으로 만난 지도는 조선반도가 일본열도와 사할린 남반부, 대만이 함께 짙은 빨강으로 칠해진 것이었다. 소위 대일본지국지도였다.

조선반도 위에는 민주국이 있었다. 장차 거기까지도 빨강으로 칠하기 위해 주황색이었다. 중국대륙 역시 빨강을 덧칠하기 좋게 노랑색이었다. 이것을 대동아공영권이라 했다.

해방 뒤의 한반도지도는 일제의 빨강은 없어졌으나 곧 38선이 그어져 그 이남의 지도에 익숙해졌다.

그러므로 대동여지도는 식민지시대의 지도와 분단시대의 지도가 드러내고 있는 한반도의 불행을 씻어내는 한민족 본래의 삶을 뜻하는 것이다.

지구상의 온갖 세력분포를 담아온 지도는 늘 변해야 했다. 대체로 50년 단위 100년 단위로 세계는 침략과 합병의 탐욕으로 각각의 영토가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한반도 역시 저 상고 이래 파란만장의 지도 바꾸기를 통해 오늘에 이르렀다. 그 변화는 근대 이후라고 멈추지 않을 것이다. 대동여지도가 확보하고 있는 생존 공간이 우리에게 새삼 소중한 것은 그것이 바로 통일시대의 지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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