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 일기] 산자부장관의 '환율 걱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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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외환위기 이후 국내에서 취재하는 외신기자들의 영향력이 부쩍 커졌다. 이들은 증시나 외환시장에 영향을 미칠 뉴스가 있는 곳에 나타나 브리핑 도중이라도 중요한 것이 있으면 바로 기사를 부른다. 이들이 송고한 기사는 즉시 딜러의 전용단말기에 뜨거나 전세계적인 네트워크를 통해 보도돼 거의 '빛의 속도' 로 시장에 영향을 미친다.

26일 낮 외신기자들과의 간담회에서 장재식 산업자원부 장관이 던진 한마디 때문에 원화 환율이 출렁거렸다. 張장관은 "현재 환율은 너무 높으며 1천2백원에서 1천2백50원 정도가 적정 환율" 이라고 발언했고, 이것이 시장에 전해지자 환율은 전날보다 10원 넘게 떨어졌다.

한 시중은행 외환딜러는 "외환정책 담당자도 시장을 안정시킬 목적으로 구두(口頭)개입을 하는 경우를 제외하곤 말을 아껴야 하는데, 주무 장관도 아니면서 장중에 적정 환율을 운운한 것은 비상식적인 행동" 이라고 꼬집었다. 재경부 관계자도 "정부 일각에서 환율이 높다 혹은 낮다고 얘기하는 것은 자칫하면 대외적으로 환율조작국이란 인식을 심어줄 수 있다" 고 지적했다.

다섯달째 수출이 줄어드는 가운데 수출을 독려해야 할 산자부 장관이 환율이 내려가야 한다고 발언한 점에 대해서도 외환시장은 이해하기 어렵다는 반응이다. 이에 대해 산자부 관계자는 "기자가 적정 환율을 물어 개인적인 의견을 얘기한 것일 뿐 우리 정부가 시장개입 의사를 갖고 있다는 뜻을 말한 것은 아니다" 고 해명했다.

하지만 공인인 장관이 외신기자들을 상대로 공식 석상에서 말한 것을 사견이라고 넘기기엔 이미 파장이 너무 컸다. 시장은 정책을 책임지는 관료들의 말 한마디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지난 3월 일본에선 미야자와 기이치 재무상이 일본의 재정상황이 심각하다는 발언으로 엔화가치가 폭락하자 사견이라고 변명했다가 여론의 질타를 받고 결국 의회에서 공식 사과한 적이 있다. 국회의원은 국회 내 발언에 대한 면책(免責)특권이 있지만 관료의 시장과 관련한 발언은 면책 특권이 없다. 무심코 던진 한마디가 시장에 돌이키기 어려운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을 정책 담당자는 명심해야 한다.

정철근 경제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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