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북의 중·러 접근과 남북관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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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북한의 김정일(金正日)국방위원장이 어제부터 러시아 공식방문에 나섰다. 1주일 이상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달려 다음달 4, 5일께 모스크바에서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한다고 한다.

남북대화가 반년 이상 교착상태에 빠져 있고, 북.미대화에 이렇다 할 진전이 없는 상황에서 金위원장이 러시아를 찾았다는 점에서 그의 행보에 비상한 관심이 쏠리고 있다.

金위원장의 이번 방문은 지난해 7월에 있었던 푸틴 대통령의 북한 방문에 대한 답방 성격이라고 볼 때 예상됐던 일이긴 하지만, 1986년 김일성 주석 이후 북한 최고지도자로서 최초의 러시아 방문이며 권력승계 이후 金위원장의 첫번째 해외 공식 나들이라는 점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한.러 수교 이후 소원해졌던 북.러 관계는 지난해 2월 '친선.선린.협력조약' 체결로 새로운 협력의 발판을 마련하면서 활력을 되찾기 시작했다.

특히 한반도에서 러시아의 영향력을 회복하고자 하는 푸틴 대통령의 강한 의지는 金위원장과의 '북.러 공동선언' 채택으로 이어졌고, 지난 4월 '방산 및 군사장비 분야 협력협정' 체결로 구체화했다. 따라서 金위원장은 이번 방문에서 군사분야를 중심으로 실리를 취하면서 북.미대화 재개를 앞두고 러시아와의 결속을 과시하는 효과를 노리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金위원장의 이번 러시아 방문에 이어 오는 9~10월로 예상되는 장쩌민(江澤民) 중국 국가주석의 북한 방문이 실현되면 북.중.러 3국 정상의 교차방문이 마무리된다. 이미 중국과 러시아는 새로운 동반자 관계를 선언했다. 경제대국으로 급부상하고 있는 중국과 여전히 군사대국인 러시아의 결속은 북.중.러 3각동맹의 형성을 뜻한다.

이미 3국은 반(反)미사일방어(MD)체제에서 공동전선을 펴고 있다. 부시 행정부와 고이즈미 정권 출범 이후 한.미.일 3국공조가 차질을 빚고 있는 상황에서 자리잡는 북방 3각동맹은 한반도 주변에 신냉전의 불길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정부는 金위원장의 러시아 방문이 북.미대화와 남북대화 재개에 앞선 절차로 보는 안이한 태도에서 벗어나 상황을 냉정하게 인식해야 한다.

6.15 공동선언이 체결되던 1년 전 상황과 지금 상황은 크게 달라지고 있다. '베를린 선언' 에서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이 북한에 심어준 기대의 거품이 빠지면서 북.중.러의 접근이 가속되고 있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북.중.러의 접근이 남북관계와 한반도 정세에 어떤 변수로 작용할지 정부의 통찰력있는 인식이 필요하다. 단순히 金위원장의 서울 답방만 기대하기엔 주변정세가 크게 달라지고 있다는 상황인식이 긴요하다. 불확실한 상황을 타개하는 유일한 열쇠는 장기적 안목으로 조급증을 버리고 한.미.일 공조를 확실히 다지는 데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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