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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함이나 바다보다 무서운 건 국민 불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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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제2차 세계대전 직후인 1945∼49년. 미 해군은 국내의 ‘해군·해병 무용론(無用論)’에 시달렸다. 거함거포(巨艦巨砲)의 일본 해군이 제거됐고, 최대 가상적국인 소련의 해군력도 변변치 않은 터였다. 더 이상 바다의 통제를 위해 해군에 큰돈 쓸 이유가 없다는 목소리가 고조됐다. 소련엔 침공할 섬도 없는데 해병은 또 무슨 필요냐는 얘기까지 나왔다. 게다가 원자폭탄이 개발된 마당이었다. 공군기에 원폭을 실어 소련 본토를 공격하는 ‘공군력 강화’로 무게중심이 옮겨갈 참이었다. 『미해군 100년사』에 따르면 실제 이 기간 중 미국은 거의 1만 척에 가까운 크고 작은 함정의 건조 계획을 취소했다. 해군의 날이 폐지되고, 45년 338만 명이던 해군의 수는 50년 6월엔 38만 명으로 쪼그라들었다.

그러던 해군 무용론에 쐐기를 박은 게 1950년 9·15 인천상륙작전이었다. 핵무기 시대에도 제한적인 국지전이 가능하고 해상 봉쇄, 상륙전을 통한 제해권을 위해 전통적 해군력과 해병이 긴요하다는 사실이 눈으로 확인됐다. 성공적인 장진호 철수작전 뒤 미 의회는 1952년 아예 미 해병대를 별도 부대로 독립까지 시켜줬다. 오늘날 미 해군의 건승에 결정적인 전기를 제공한 게 바로 서해였던 셈이다. 해상왕 장보고의 활약,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서해 보급로 봉쇄와 함께 미 해군 부활의 전설(傳說)까지 녹아든 이 해역의 전투 태세가 한·미 해군의 자존심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천안함 사건이 남다른 또 다른 이유는 리더십·위기극복이란 단어와 해군은 늘 동전의 양면이었던 때문이다. 거친 파고와 조류, 암초와 폭풍우, 도망갈 곳조차 없는 망망대해에선 주변의 모든 상황이 적함보다 무서운 위기의 요인이다. 해군 수병의 넥타이조차 바다에 빠졌을 때 발목 등에 매 사람 키보다 커보이려는 목적이 담겼다. 상어의 공격 위험을 낮춰보자는 것이다. 그들의 나팔바지 역시 끝을 묶어 유사시 부력 구명복으로 활용하기 위함이다.

위기극복을 위해 함장의 판단력은 물론 승조원 간의 기강과 인화 등 총체적 리더십이 필요한 공간이 함정이다. 일부 치외법권까지 인정받는 ‘움직이는 국가’이기도 하다. 함정의 대통령인 함장의 의자는 누가 와도 내주지 말라는 해군의 불문율이 생긴 이유다. 미 해사의 교관은 미래의 함장인 해사 생도들의 대양 훈련 때마다 “입술에 피를 흘려야 한다”는 금언이 있다. 꾸중과 통제보다 자율의 리더십을 키워주려 참고 또 참아야 한다는 얘기다.

해군은 그래서 숱한 영웅을 배출해 내기도 했다. 트라팔가 해전의 영웅인 영국의 넬슨 제독은 자신의 아내에게 부칠 편지를 행낭에 넣는 것을 빠뜨린 한 수병을 위해 떠나버린 연락선을 회항시키게 했다. “내일 전투에서 그가 전사할지 누가 알겠는가”라는 게 그의 배려였다. 해군장관 시절 장군보다 사병들이 있는 전함 하갑판을 즐겨 찾던 처칠 영국 총리와 해군 어뢰정 영웅이던 케네디 전 미국 대통령, 존 케리·존 매케인 대통령 후보까지 적잖은 정치 리더들이 바로 해군에서 등장했던 이유다.

리더십의 표상인 해군의 전력과 그 국가의 위상 역시 비례해 왔다. 함정의 척수, 톤수, 전투능력 등을 종합한 우리 해군의 전력은 지금 국력 수준에 비슷한 세계 13위 정도로 평가 받고 있다. 올해로 창설 65년을 맞은 해군은 그간 이지스급 세종대왕함 취역(2008년)∼대청해전 승리(2009년)∼기동군단 창설(2010년)로 외형적 성장에 대한 평가를 받아왔다.

그러나 천안함 사건 이후 드러난 우왕좌왕 대응, 치밀하지 못한 위기관리 능력은 국민에게 적잖은 불신과 의문을 안겨주었다. 바로 국가적 리더십과 위기관리 능력의 가늠자인 해군에서 벌어진 일 때문이다. 천안함의 인양 이후 철저한 진상 규명과 자성(自省)을 거쳐 해군이 거듭 태어나야 할 이유다. 해군의 구호대로 ‘약한 자를 절대 허용치 않는다’는 바다지만, 바다보다 더 무서운 것은 그들을 자랑스러워 해왔던 국민의 신뢰를 잃어버리는 일이다.

최훈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