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 포럼] 영어 천국의 그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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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바야흐로 영어 천국이 됐다. 사람들이 각기 다른 언어를 사용한 탓에 바벨탑을 세우지 못했다는 얘기가 성서에 나오지만 요즘 세상이라면 어림없다.

더욱이 20세기를 발전시킨 과학문명의 첨병 인터넷이 세계를 자연스럽게 영어의 품으로 몰아가고 있지 않은가. 언어에 대한 자존심이 세기로 으뜸이라던 프랑스인마저 요즘엔 영어를 한마디쯤 해야 '유식함' 을 인정받을 정도란다.

파리에 가 길을 잃은 여행객이 영어로 물으면 시침을 뚝 떼고 프랑스어로 답한다던 파리지앵들이 말이다.

*** 신분상승 위한 필요조건

그러니 좁아 터진 한반도의 반토막, 인간만이 유일한 재산인 척박한 이 땅에서 '살아남기' 가 지상 최대의 과제인 한국인들에게 영어가 필수가 돼 버린 것은 당연하다. 대학에 들어갈 때도,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인이 돼 취직시험을 치를 때도 발목을 붙드는 것은 영어다.

우리 말과 문장이 주 업무인 언론사에서도 일정 수준의 영어 실력을 확보하고 있지 않으면 아예 시험 치를 자격조차 주지 않는다. 서울시교육청에서도 2002년부터는 초등교사 임용 과정에 영어 인터뷰를 도입한다지 않는가. 굳이 외국인이 보스가 아니더라도 영어로 회의를 주재하는 기업체도 늘어간다.

그러니 '자나 깨나 영어!' 일 수밖에 도리가 없지 않은가. 근래에 일부에서는 공교육이 붕괴했다는 증거로 "봐라!

중산층이 앞다퉈 자녀 교육을 위해 이민을 가고 있지 않느냐" 고 소리치지만 교육제도가 잘 정비돼 있는 선진국 가운데도 굳이 영어 사용권으로만 교육이민이 몰리는 것으로 미뤄 나는 2세들에게 영어만이라도 똑 떨어지게 해 경쟁력을 키워주려는 것이 교육 이민자들의 참된 속내라고 생각한다.

우리 역사상 처음엔 한문이, 그 뒤엔 일본어가 출세의 수단이 됐던 것처럼 이젠 영어가 신분상승-아니 신분유지라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을 위한 필요조건이 된 셈이니까. 한때 '아이디어 차원의 얘기' 라고 서둘러 묻어버리긴 했지만 제주도에서 영어를 제2공용어로 하자는 제안이 일각에서 나왔던 것도 이런 우리 사회의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세계 공용어로 확실하게 자리매김을 해나가고 있는 영어를 잘 하기 위해 애쓰는 것이야 백번 좋은 일이지 나쁠 턱이 없다. 그러나 무엇이든 지나치게 한 방향으로 쏠리는 우리네의 그릇된 습성이 영어의 격랑 속에서도 나타나고 있는 듯해 안타깝다.

우리의 말과 글이 가장 중요한 업무 수행 능력이 된다면 이 일을 담당할 사람의 기본 요건은 일정 수준의 우리 말과 글이라야 한다. 영어실력은 그 다음이다.

우수한 영어 능력은 인센티브로 활용함이 옳을 것이다. 영어를 모국어 수준으로 할 수 있는 이들로 구성된 조직이 아니라면 오히려 영어로 하는 회의는 회의의 효율성을 떨어뜨릴 수 있다. 언어가 사고를 지배하기 때문이다.

모국어는 말이 생각을 좇아가지만 외국어는 생각이 말을 좇아가는 것이 차이점이라고 언어학자들은 말한다. 외국어를 사용할 때는 먼저 머리 속으로 말을 생각해보고 자신의 견해를 적확한 단어로 표현할 수 없을 경우 다른 단어로 대체하거나 아예 표현하기를 포기해 버린다는 것이다.

다른 외국어의 설 자리가 급격하게 줄고 있는 것도 문제다. 외국어 고교는 외국어에 능통한 인재들을 길러내는 것이 교육목표다. 외고엔 영어는 물론 중국어.독일어.프랑스어.일어에 심지어 러시아어 반까지 있지만 영어 이외의 전문어 특기생은 정원의 2.5%에 불과하며 일반 전형의 기준은 사실상 영어다.

*** 他외국어 인재도 길러야

대학에서도 어문학 계열 중 영어영문학을 제외한 나머지 학과들은 명맥을 잇기도 버겁다. 모든 대학이 다양한 어문학과를 둘 필요는 없지만 지금처럼 유수한 대학에서조차 존속이 불투명한 것은 심각한 일이다. 주요 외국어의 인재들은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서도 반드시 필요한 기본인력이 아닌가.

빛나는 태양은 그늘도 만들어 낸다. 행여 눈부신 빛에만 현혹돼 그늘을 못보고 지나치고 있지는 않은지 차근히 살펴볼 때다.

홍은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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