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이브러햄 임 감독 "한국계 연기자 키우고 싶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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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6면

미국 독립 영화계의 거장인 로버트 알트먼 감독이 가장 아끼는 젊은 감독은 에이브러햄 임(32)이다. 둘의 인연은 1997년 시작됐다.

임감독이 뉴욕대 영화과 졸업작품으로 만든 단편 '플라이' 를 본 알트먼 감독측에서 그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대뜸 "지금 뭐 하느냐. 좀 만나자" 고 했다. 임감독은 뜻밖의 전화를 장난쯤으로 치부하고 그냥 끊어버렸다고 한다. 다시 전화가 왔고 진의를 파악한 그는 곧장 로스앤젤레스로 날아갔다.

'플라이' 에 매료된 알트먼은 제15회 선댄스 영화제 개막작이었던 '쿠키의 행운' 의 편집을 선뜻 그에게 맡겼다. 결과는 극히 만족스러웠다. 그 때부터 열렬한 후원자로 나선 알트먼은 임감독이 주연.감독.편집 등 1인 5역을 해낸 '길+다리' 의 제작자로 나서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임감독은 알트먼을 "어려울 때마다 힘이 되어주는 할아버지" 라고 말한다.

그가 고국을 찾았다. 기억도 희미한 일곱살 무렵 다녀간 후 처음이다. 그의 장편 데뷔작인 '길+다리' 가 제5회 부천국제영화제의 월드 팬태스틱 시네마 부문에 출품되면서 한국을 찾을 기회가 생긴 것. 미국 캔자스주에서 태어난 임씨는 대학 재학 시절부터 뮤직 비디오 제작과 편집에 재능을 보여온 한국인 2세. 할리우드에서 활약하는 한인 감독으로 그렉 박.크리스 유.크리스 찬 리 등이 있지만 에이브러햄 임이 지명도가 가장 높다.

'길+다리' 는 감독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작품으로 흑인과 아시아인에 대한 백인들의 노골적인 인종차별을 다룬다. 차별에 대해 반항과 타협이라는 서로 다른 접근방식을 보이는 두 주인공을 통해 미국 사회에서 유색 인종이 지켜야 할 자존심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준다. 스무살이 되기 전 감독의 경험이 곳곳에 녹아 있다.

무거운 주제에도 불구하고 우아함과 섬세함을 갖춘 수작으로 평가받는다. 로스앤젤레스 인디펜던트, 햄튼스 등 여덟개 영화제에 출품돼 좋은 평가를 받았고, 올해 말 캐나다 밴쿠버에서 개봉될 예정.

17일 오후 부천 복사골문화관에서도 상영돼 좋은 반응을 얻었다. 그러나 미국 개봉은 백인들이 좋아할 리 없는 주제라서 어려움을 겪고 있다. 대신 80년대 청춘스타로 이름을 날린 여배우 앨리 쉬디가 햄튼스 영화제에서 이 영화를 본 후 "임감독의 다음 작품에 출연하고 싶다" 는 의사를 전해와 그에게 큰 힘이 되기도 했다.

임감독은 "할리우드는 유색 인종이 활동하기 참 어려운 곳이다. 개인적으로 한국계 연기자들이 재주에 비해 활약을 못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상업적으로 성공한 영화를 만들어 그들을 스타로 키우는 게 꿈" 이라고 말했다.

그는 캔자스대학에서 연기를 전공했으나 아시아인으론 배역 맡기가 힘들기 때문에 배우의 꿈을 포기하고 뉴욕대로 편입, 영화를 공부했다.

"한국인들이 많이 사는 곳에서는 오히려 차별을 덜 느끼지만 내가 자란 캔자스주 마을에는 우리 가족만 유색인이었죠. 제가 한국말을 못한다고 해서 미국 사람 다 됐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저만큼 한국인임을 절감하고 산 사람도 없을 걸요. "

다음 작품으로 미국 시나리오 작가 홀튼 풋이 각본을 쓴 '파인딩 크리스마스' 를 연출하기로 했다. 그는 "인종차별을 주제로 한 영화를 만들며 정신적으로 많이 지쳤다" 며 "12월께 촬영에 들어갈 새 영화는 백인 중심의 전형적인 미국 영화가 될 것" 이라고 말했다.

글=신용호.사진=김태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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