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160> 일류 인물들이 만든 이류당④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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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사(新華社) 사장 시절 담배를 피우다 부인 징푸춘(經普春)에게 들킨 랴오청즈가 부하 직원들 앞에서 호되게 야단맞는 장면. 당시 신화사에서 가장 재미있는 구경거리였다. 김명호 제공

1979년 1월 중화인민공화국은 미국과 수교했다. 대만 문제에 여유가 생겼다. 무력통일 대신 화합과 대화를 통한 국공 문제 해결을 제시했다. 자존심이 상한 대만의 국민당 정부는 ‘불(不)담판, 불접촉, 불타협’의 3불(三不) 정책을 고수했다.

82년 7월 25일 전인대 부위원장 랴오청즈(廖承志)는 인민일보를 통해 대만 총통 장징궈(蔣經國)에게 보내는 ‘즈장징궈신(致蔣經國信)’을 발표했다. “그간의 증오를 털어 버리고 다시 합작의 길을 모색하자”는 내용이었다. ‘내 동생 징궈(經國吾弟)’로 시작되는 가서(家書) 형식의 편지였다. “나이가 들면 지난날이 더욱 그리운 법, 요원하기만 한 남쪽 하늘 넋 잃고 바라보느니, 너만 괜찮다면 당장 짐을 꾸려 네가 있는 타이베이로 가겠다”며 “땅끝까지 가서 파도만 도둑질하면 그곳에 내 형제가 있다. 서로 만나 한 번 웃으면 은혜와 원한 모두가 물거품”이라는 루쉰의 시(詩)까지 한 구절 인용했다. 말미에는 노부인(장제스의 부인 쑹메이링)에게 대신 문안인사를 전해 줄 것을 청하고 팡량(方良:장징궈의 부인), 웨이궈(緯國:장징궈의 동생)와 조카들의 안부를 챙겼다.

랴오청즈는 대만총통 장징궈를 공개적으로 “내 동생”이라고 불러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두 사람은 소년 시절 한 울타리 안에서 살았다. 랴오는 황포군관학교 서기의 아들이었고 장은 교장 장제스의 아들이었다.


▲1980년 9월 루쉰 탄생 100주년 기념위원회
회의를 마치고건배하는 랴오청즈(왼쪽)와 딩충.

1979년 1월 중화인민공화국은 미국과 수교했다. 대만 문제에 여유가 생겼다. 무력통일 대신 화합과 대화를 통한 국공 문제 해결을 제시했다. 자존심이 상한 대만의 국민당 정부는 ‘불(不)담판, 불접촉, 불타협’의 3불(三不) 정책을 고수했다.

82년 7월 25일 전인대 부위원장 랴오청즈(廖承志)는 인민일보를 통해 대만 총통 장징궈(蔣經國)에게 보내는 ‘즈장징궈신(致蔣經國信)’을 발표했다. “그간의 증오를 털어 버리고 다시 합작의 길을 모색하자”는 내용이었다. ‘내 동생 징궈(經國吾弟)’로 시작되는 가서(家書) 형식의 편지였다. “나이가 들면 지난날이 더욱 그리운 법, 요원하기만 한 남쪽 하늘 넋 잃고 바라보느니, 너만 괜찮다면 당장 짐을 꾸려 네가 있는 타이베이로 가겠다”며 “땅끝까지 가서 파도만 도둑질하면 그곳에 내 형제가 있다. 서로 만나 한 번 웃으면 은혜와 원한 모두가 물거품”이라는 루쉰의 시(詩)까지 한 구절 인용했다. 말미에는 노부인(장제스의 부인 쑹메이링)에게 대신 문안인사를 전해 줄 것을 청하고 팡량(方良:장징궈의 부인), 웨이궈(緯國:장징궈의 동생)와 조카들의 안부를 챙겼다.

랴오청즈는 대만총통 장징궈를 공개적으로 “내 동생”이라고 불러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두 사람은 소년 시절 한 울타리 안에서 살았다. 랴오는 황포군관학교 서기의 아들이었고 장은 교장 장제스의 아들이었다.

김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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