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미진 네번째 장편 '그 여름 정거장' 펴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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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독립투사?

웃기고 있네. 우리가 고민하는 게 뭐야?

예전 선배들은 그게 남이냐 북이냐 하는 거였어. 지금은 달라. 생존은 불안하고 세계는 우리를 부른다. 지금 우리 문제가 뭐야?

한국 땅에 그대로 있을 거냐? 아니면, 밖으로 튈거냐?

바로 그것 아냐?"

올 여름에도 대학생 등 많은 젊은이가 배낭 하나 무겁게 짊어지고 세계로 튀어나가고 있다. 이념이 사라진 전세계의 자본주의화 시대, 그들은 뭘 보고 무슨 생각으로 돌아다니고 있는 것인가.

세계화 시대, 신유목 사회의 자유를 맘껏 즐기고도 허전하게 남은 마음은 무엇인가. 김미진씨가 최근 펴낸 네번째 장편소설 『그 여름 정거장』(문예중앙.8천원)은 20대 젊은이들의 유럽 배낭 여행 실태를 현장감 있게 보여주면서 그들의 세계관과 사랑을 다루고 있다.

소설의 주인공은 사라진 조선 황실의 후예인 황세손(皇世孫)이빈과 여대생 유준. 황세손이라는 위엄과 격식에 묶이길 거부하는 빈은 26세의 나이로 암 판정을 받고 여생을 병상이 아니라 자신의 의지대로 살겠다며 몰래 유럽으로 떠난다. 편부 슬하에서 자란 유준은 여름방학을 맞아 2학기 등록금으로 아버지 몰래 무작정 유럽 배낭여행을 떠난다.

로마.파리.바르셀로나 등 유럽 어느 도시를 가도 배낭여행을 하는 한국 젊은이들로 붐빈다. 일군의 젊은이들이 같이 여행을 하다 헤어졌다 어느 한 지점에서 다시 만나기도 하면서 여행을 하는 모습은 마치 옛날 유목 사회를 보는 것 같다.

그들의 일정 역시 어디에 매여있지 않아 즉흥적으로 바뀔 수 있다. 그런 여행 도중 빈과 준이 만나고 헤어지며 평생 잊혀지지 않을 사랑의 의미로 남는다는 이야기다.

"특권도 명예도 사라진 허울만 남은 왕족, 그 거추장스러운 굴레를 벗고 자유를 호흡해라. 세월은 준비하는 자에게만 오는 거다. 환영과 착각의 시간이 아니라 진짜 시간, 네 스스로 인생의 주인공이 되는 그런 시간을 찾아가라. 그리고 다시 돌아오지 마라. 뒤도 돌아보지 마라. "

무너진 왕가지만 그래도 그 종손으로 그 전통과 영예의 무게를 지탱하지 못하고 자살한 빈의 형의 말이다. 인터넷으로 상징되는 정보화.유목 사회에서 기존의 구분에 의한 특권이나 명예는 이미 사라졌다.

그렇다면 이시대 젊은이들의 가치와 남은 꿈은 무엇인가. 작가 김씨는 언뜻 만난 사랑이지만 거기에 죽음까지 따라갈 수 있는 의미를 부여하며 직선적인 삶이 아니라 점(點)적인 신유목 사회에서의 삶의 가치를 탐구하고 있다.

젊은이의 순백한 사랑을 유럽배낭 여행 정보로도 활용 될 수 있을 정도의 세밀함에 실어놓은 김씨는 이 작품 출간 후 동.서양이 만나는 터키 이스탄불로 배낭을 메고 다시 떠났다.

이경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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