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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과 더불어] 사회의 약자 배려 할때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5면

얼마 전 샌프란시스코에서 아홉살 난 한국인 입양아 수미를 만났다.

수미는 친부모에 대해 아무 것도 기억 못하는 소녀다.

그 양부모는 형편이 넉넉지 못했다. 그래서 부근의 중학교 수업이 끝나면 교실의 쓰레기를 치우는 청소일을 했다. 수미도 양부모와 함께 쓰레기통을 정리하곤 했다.

동행했던 한국인 교수는 수미를 볼 때마다 "가슴이 답답하다" 고 말했다. 한번은 쓰레기를 치우던 수미가 우리를 쳐다보더니 "내 엄마도 당신들처럼 생겼을까요" 라고 물었다. "아마도 비슷할 거야" 라고 답했던 우리는 내심 안타까움과 부끄러움을 느껴야 했다.

자기가 낳은 아이를 보육시설에 맡기는 부모, 또 그 아이들을 기르지 못하고 타국에 보내는 나라, 그 어느 쪽도 변변치 못하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차라리 자유와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사회에서 성장하는 것이 나을 것이라고 위안을 해봤지만 사실 이것도 부질없는 일이다. 친부모와 조국에 버림받는 것은 자신의 존재를 송두리째 부정당하는 심리적 고통이 아닌가.

버림받은 아이들에게 우리는 이런 고통을 안겨서 외국으로 떠밀어내고 있는 것이다.

최근 거리에서 애견을 안고 다니는 사람들을 자주 본다. '선진국의 개들은 사람보다 나은 대접을 받는다' 고 생각한 것이 불과 수년 전 일이다.

이젠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게 된 그런 모습을 보면서 '아이를 키우는 데 인색한 사람들이 개를 키우는 데는 왜 그리 후한지 모르겠다' 는 생각을 하곤 한다.

사람을 키우는 데는 책임이 따른다는 부담을 느끼거나 사람은 배신할 수 있다는 두려움을 갖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런 부담과 두려움의 저변에 우리의 인식을 지배하는 지나친 혈연의식이 작용하는 것은 아닌가.

"내가 낳은 아이는 우연히 생긴 자연의 결과지만 너는 우리의 의지로 선택한 아이" 라고 당당히 말할 수 없는 것일까. 피를 나눈 자식과 입양한 자식이 전혀 다를 게 없다고 생각할 수는 없을까.

중앙일보가 장기 연재한 '그들과 더불어' 시리즈에 등장한 여러 사연들을 읽으면서 떠올렸던 생각이다. 굳이 자식 문제를 끄집어낸 건 우리에게 유달리 끈끈한 혈연의식과 가족 이기주의를 짚어보고 싶어서다. 나를 넘어서, 혈연을 넘어서 이 시대에 한 공간에서 살아가는 이들을 소중히 여기는 열린 생각을 가져보자.

가령 양부모와 학교.사회가 혈연의식을 넘어 열린 가정을 만들어 가는 사회가 바로 그런 사회일 것이다. 사회정의란 생각해 보면 거창한 것이 아니다. 사람에 대한 작은 배려에서 시작되는,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어린이와 노인.장애인 등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는 의식이 바로 선진 의식이고, 그들을 배려하는 제도가 선진 복지제도다.

나 중심의 이기심을 넘어, 혈연 중심의 우리를 넘어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는 사회를 만들 때 우리는 모두 사회적 약자가 될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다.

금전은 사회적 약자를 위해 쓰일 때 악취가 사라지고, 지식은 약자에 대한 애정으로 쓰일 때 더 가치롭다.

가정.학교.사회가 '사람이 소중한 존재며 서로 도우며 살아가야 한다' 는 것을 가르치자. 가슴을 열어 큰마음으로 무관심 속에 버려진 우리의 이웃들을 받아들이자.

이순형(서울대학교 아동가족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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