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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하마을 묘역서 “노무현 전 대통령이 저를 지켜주신 것”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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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호 06면

한명숙 전 총리가 10일 김해 봉하마을을 찾아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임시 묘역에 헌화하고 있다. 한 전 총리 왼쪽은 김진표 의원, 오른쪽은 김정길 전 행정자치부 장관. [연합뉴스]

10일 오전 8시55분, 서울 동교동 김대중 전 대통령 사저.
한명숙 전 총리가 이희호 여사를 예방하기 위해 차에서 내렸다. 전날 서초동 법원에서의 긴장된 표정과는 달리 얼굴이 밝았다. 그는 뇌물수수 혐의로 검찰에 기소됐다 1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사저로 들어섰다. 한 전 총리는 짙은 남색의 투피스 정장 차림이었다. 그는 법원에서 재판을 받을 때도 이 옷을 입었다. 하지만 재판을 받는 과정에서 줄곧 둘렀던 보라색 목도리는 하지 않았다. 대신 네모 무늬가 새겨진 살구색 스카프를 했다. 그가 오랜만에 목에 두르는 액세서리를 바꾼 것은 전날 재판 승리로 기분이 다소 좋아졌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게 주변의 전언이었다.

한명숙 전 총리,1심 무죄 판결 후 첫날 행보

동교동에선 이희호 여사 만나
한 전 총리가 접객실에서 이 여사를 기다렸다. 주변에서 “고생이 많으셨다”고 하자 “말로 다 할 수 없었다”고 그간의 심경을 내비쳤다. 이 여사가 들어서자 두 사람은 손을 꼭 잡았다. 이 자리에는 임종석 전 의원, 정윤재·최경환 전 청와대 비서관이 배석했다.

▶이 여사=“검찰이 자꾸 만들어서 흠집 내기를 하고 싶어 하는 것 같습니다.”

한명숙 전 총리가 10일 오전 서울 동교동 김대중 전 대통령 사저에서 이희호 여사를 만났다. [연합뉴스]

▶한 전 총리=“이번 일을 겪으면서 김대중 전 대통령님 생각이 많이 났어요. 오랫동안 정치하면서 공작정치에 희생을 당하시고 아픔을 많이 겪으셨지요. 그렇게 많이 당하셨지만 보복정치를 하지 않으셨어요. 정말 훌륭한 정치가셨습니다. 이번에 저도 당하면서 나라도 많이 걱정됐습니다.”

▶최 비서관=“재판 때마다 여사님이 TV를 꼭 보셨습니다.”

▶한 전 총리=“너무 지독하더군요. 김대중 전 대통령님이 ‘역사는 우리에게 진실만을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역사는 시간 앞에 무릎을 꿇는다. 시간이 지나면 역사의 진실을 알게 될 것’이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참 좋은 말입니다. 요즘 책을 읽으면서 지내시나요.”

▶이 여사=“책도 읽고 성경도 보고 그러죠. 일주일에 화·토요일 두 번 현충원에 갑니다.”

이 여사와 헤어진 그는 곧장 김해로 향했다. 비행기를 타고 이날 낮 12시20분쯤 봉하마을에 도착했다. 그는 노무현 전 대통령 묘역을 찾았다. 노 대통령 재임 당시 총리를 지낸 그는 노 전 대통령 서거 때 장례위원장을 맡았다. 묘역에서 그는 끝내 눈물을 참지 못했다. 한 전 총리는 “재판 중 가장 생각나는 이가 노 전 대통령”이라고 주변에 말하곤 했다고 한다.

한 전 총리는 이 자리에서 “제가 길고 험난한 길을 뚫고 사법부에서 무죄를 받은 이후 봉하마을을 찾아 노 전 대통령을 꼭 찾아뵈어야겠다고 생각했다”며 “국민이 노 전 대통령을 지켜 주지 못했는데 노 전 대통령이 저를 지켜 주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오늘 참배를 드리면서 정치가 바른길로 들어서 이제 정치공작 같은 것은 없는 세상을 만들어야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며 “사람 사는 세상 만드는 데 많은 국민이 함께해 좀 더 편안한 세상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절감했다”고 덧붙였다. 이 자리에는 김진표·이광재 의원, 문재인 전 청와대 비서실장, 김정길 전 행정자치부 장관 등이 함께했다. 김 의원은 경기지사, 이 의원은 강원지사, 김 전 장관은 부산시장 출마를 준비 중이다.

묘지 참배 후 한 전 총리는 권 여사와 만났다. 두 사람은 만나자마자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렸다. 잠시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어 두 사람은 김진표 의원과 함께 사저에서 오찬을 함께했다. 한 전 총리는 이어 부산으로 이동해 서면 교보문고에서 자서전 사인회도 했다.

정세균·이해찬·유시민 등 야권 총집결
무죄 판결을 받은 한 전 총리가 본격 선거 행보에 나서고 있다. 조만간 서울시장 출마를 공식화하고 캠프도 꾸릴 예정이다. 그동안 실무진 차원에서 만들어 온 공약 등을 다듬어 이달 내에 출마 선언을 한다는 방침이다. 공동 선거대책위원장으로는 이해찬 전 총리가 거론된다. 캠프에는 임종석 전 의원이 대변인으로 합류할 것으로 보이며 김형주 전 의원, 정윤재 전 비서관 등도 함께한다.

한 전 총리 측은 검찰과의 대립각을 계속 세워 나간다는 입장이다. 먼저 ‘한명숙 정치공작분쇄 공동대책위’는 11일 기자회견을 하고 이에 대한 입장을 밝힐 예정이다. 검찰이 정치자금 추가 수수 의혹을 제기한 것을 ‘한명숙 죽이기 2차 공작’으로 규정하고 공세를 이어 나갈 방침이다. 검찰과의 싸움이 이번 선거에서 오히려 도움이 된다는 판단도 하고 있는 듯하다.

민주당도 검찰과 여권에 대한 공세를 이어 갔다. 우상호 대변인은 이날 “야권의 유력 서울시장 후보를 흠집 내기 위한 정치적 수사·기소임이 확인됐다”며 “이번 선거에서 국민의 심판을 면치 못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최재성 의원도 “검찰이 무리하게 기소해 무죄가 입증된 만큼 책임과 검찰 개혁을 피하기 어렵게 됐다”며 “한 전 총리에 대한 추가 의혹 제기는 당황한 검찰의 ‘할 때까지 수사’”라고 공격했다.

검찰의 추가 의혹 제기가 범야권을 결합시키는 효과도 나타나고 있다. 9일 오후 2시 한 전 총리의 1심 공판이 열린 서초동 서울지방법원에는 야권 인사들이 대거 몰려들었다. 친노 및 참여정부 인사뿐 아니라 민주당 인사, 국민참여당 인사, 열린우리당 시절 초선 의원 그룹 등 계파를 초월해서다. 법원 서관 앞마당이 마치 참여정부 시절 당·정·청 워크숍이라도 열린 듯했다.

이해찬 전 총리, 유인태 전 정무수석, 정찬용 전 인사수석, 강금실 전 법무부 장관, 조기숙·윤승용 전 홍보수석, 천호선 전 대변인 등 친노 인사들이 일찌감치 나와 한 전 총리를 응원했다. 노 전 대통령의 후원회장이었던 이기명씨 모습도 보였다.

국민참여당에서는 이재정 대표,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이 함께했다. 열린우리당 시절 의원을 지냈던 유승희·김영주·노웅래·김태년·김형주·홍미영·정청래·이화영 전 의원도 왔다. 민주당에선 정세균 대표, 박주선·김진표·김민석 최고위원, 이미경 사무총장, 박지원 정책위의장, 원혜영·이석현·신학용·서갑원·안민석·백원우·홍영표 의원 등이 나와 한 전 총리의 무죄를 기원했다. 주요 인사들 외에 300여 명의 지지자도 “한명숙 무죄”를 외쳤다. 한 참석자는 “이렇게 많은 인사가 모일 줄 몰랐다”며 “이는 한 전 총리에 대한 검찰의 추가 의혹 제기가 한 전 총리 주변을 자극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노빠(노 전 대통령의 극성 지지자)는 있어도 한빠(한 전 총리의 극성 지지자)는 없었는데 검찰이 한빠를 만들어 준 것 같다”고 덧붙였다.

나경원 “한 전 총리는 끝난 후보”
여권은 한명숙 대책에 부심하고 있다. 법원의 무죄 결정이 내부적으로 적잖은 충격을 준 눈치다. 하지만 아직은 신중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많았다.

청와대 핵심 관계자는 10일 “검찰이 무리했다는 인식이 있을 수 있지만 무죄 판결이 한 전 총리가 서울시장이 돼야 할 이유는 아니지 않으냐”며 “오히려 한 전 총리의 도덕성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 드러난 만큼 국민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정두언 한나라당 지방선거 기획위원장도 “이번 법원의 결정이 좋� 영향을 미치진 않겠지만 선거까지는 시간이 많이 남아 있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수도권 재선 의원은 “검찰과 법원이 한명숙 후보를 만들어 줬다”며 “상황이 어렵게 돌아간다면 서울시장 후보를 내는 문제를 원점에서 다시 생각해 봐야 할 필요도 있다”고 말했다.

이날 한나라당 예비후보 중 나경원 의원은 기자회견을 하고 한 전 총리에게 직격탄을 날렸다. 그는 “민주당은 한 전 총리의 무죄 판결이 사실상 모든 것에 면죄부를 받은 것처럼 얘기하고 있지만 한 전 총리는 끝난 후보가 아닌가 이렇게 생각한다”며 “법률상 무죄 판결이 나왔지만 도덕은 유죄”라고 주장했다.

그는 이어 “오늘 한 전 총리의 행보만 봐도 과연 서울시장, 미래의 서울을 이끌고 갈 적임자이냐에 대해 상당히 의심스럽다는 것을 이미 아실 것”이라며 “한 전 총리는 이미 심판받고 실패한 정권의 핵심 인물”이라고 지적했다.

오세훈 시장 측은 ‘앞서가는 리더론’을 부각했다. 시정 경험과 능력, 청렴 이미지를 내세우며 ‘앞서가는 후보 대 과거 인물’로 차별화에 나선다는 전략이다.

한나라당 내에선 검찰의 추가 의혹 제기에 대해 비판하는 목소리도 나왔다. 김성식 의원은 이날 검찰이 한 전 총리에 대해 별도의 불법 정치자금 수수 의혹을 수사하는 것과 관련해 “지방선거일까지는 중단돼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날 자신의 홈페이지에서 “서울시장 선거를 눈앞에 두고 있는 마당에 검찰이 별건 수사든 신건 수사든 새로 판을 벌이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며 이같이 강조했다. 김 의원은 “검찰이 (전날 무죄 판결에) 불복 항소하고 2심을 준비하는 것은 나름의 일이지만 별건 수사는 ‘뜻대로 안 되니 다른 것으로 또 물고 늘어진다’는 불신만 가중시킬 뿐”이라고 지적했다.

남경필 의원도 기자와 통화에서 “그냥 놔두면 무죄 결과가 주가에 별 영향을 미치지 않을 상황인데 검찰이 별건 수사 얘기를 꺼내니 오히려 한 전 총리의 주가가 오르게 될 우려가 생겼다”며 “가슴이 답답하다”고 말했다.

한 전 총리의 무죄 선고 이후인 10일 여론조사기관 리얼미터가 서울시민 2000명을 대상으로 여야 서울시장 후보 가상대결 여론조사(자동전화조사)를 실시했다. 그 결과 오세훈·한명숙(민주당)·노회찬(진보신당) 후보가 맞붙는 3자 대결의 경우 오 시장 47.2%, 한 전 총리 40.2%, 노 대표가 5.4%의 지지를 받았다. 또 원희룡·한명숙·노회찬 후보 간 대결에선 원 의원 37.7%, 한 전 총리 40.5%, 노 대표 5.9%였다. 나경원·한명숙·노회찬 대결에선 나 의원 36.1%, 한 전 총리 42.8%, 노 대표 7.7%로 나타났다. 표본오차는 95% 신뢰 수준에 ±2.2%p.

리얼미터가 3월 24~25일 조사한 가상대결에서는 오 시장, 원 의원, 나 의원이 모두 한 전 총리를 이기는 것으로 조사됐으나 이번 조사에선 한 전 총리가 원 의원과 나 의원을 앞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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