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외교적 언사는 신중해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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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역사 교과서 재수정 요구를 묵살한 일본 정부에 대해 격한 비난과 감정적 발언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과거를 미화하고 치부(恥部)를 축소.은폐함으로써 후대에 잘못된 역사 인식을 심어주는 것을 방조한 일본 정부에 가해지고 있는 우리의 비난과 분노는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일본과 미래지향적 관계발전의 물꼬를 앞장서 튼 김대중(金大中)대통령까지 나서 "결코 용납할 수 없다" 고 말할 수밖에 없는 그 사정을 일본은 냉정히 짚어봐야 한다.

그렇지만 金대통령의 주문대로 의연하고 침착한 태도로 대책을 세워 집행해야 할 정부 내에서조차 절제되지 않은 극단적 언사(言辭)가 난무하는 것은 문제라고 본다.

"일본은 이번 일을 두고두고 후회하고 뉘우치게 될 것" 이라는 청와대 고위 관계자의 말이 외교적 언사로서 과연 적절한 것이었는지 한번쯤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재수정 요구에 대한 일본의 공식 답변을 '잔꾀' 라고 몰아붙인 한승수(韓昇洙)외교통상부 장관의 표현도 그렇다. 김영삼(金泳三)전 대통령은 1995년 공식 석상에서 "일본의 버르장머리를 고쳐놓겠다" 고 말해 두고두고 문제가 됐다.

역사 교과서 문제가 말로 해결될 것 같았으면 진작 해결됐어야 한다. 정부에 지금 필요한 것은 거친 말이 아니라 실효성 있는 행동이다.

말만 앞서다 보니 '시간이 지나면 결국 저러다 제풀에 지치고 말 것' 이라고 오히려 우습게 보인 점은 없었는지 되돌아볼 일이다. 외교적 언사는 최대한 신중하게 하되 구체적 대안으로 우리의 의지를 보여줘야 한다.

교과서 문제에 관한 대책이라고 중구난방으로 거론되고 있는 것들 가운데는 실효성이 의심스러운 것도 있고, 국민 감정을 의식한 무리한 대책도 없지 않은 것 같다.

이럴 때일수록 정부는 말을 아끼고, 면밀하게 수립한 실천적 대책을 단계별로 하나씩 하나씩 실행에 옮기는 것이 중요하다. 이점 중국의 대응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전략적 사고를 바탕으로 일본 정부를 움직일 수 있는 실효성 있는 대책 마련과 시의적절한 집행에 모든 지혜를 모아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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