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있는 아침] 박용래 '곡'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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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오동나무 밑둥

한쪽만 적시는

가랑비

지난날을 울어

저 철로 건널목

어른대는 역부(驛夫)

하얀 수기(手旗)에

돌을 쪼으듯 울어

아아 인간사

스무 살까지라는데

젊어서 그랬듯

서서 울어.

- 박용래(1925~1980) '곡(曲)'

눈물의 시인 박용래. 그의 시집은 어느 페이지를 펼쳐 읽어도 절창의 울음이 빼곡이 들어차 있다. 그 우는 소리를 듣고 우리는 미안할 정도로 즐거워진다.

여기서도 단아한 언어, 세심하고 촉촉한 눈길, 연민을 길어 올리는 어조가 마음의 가야금 현을 뜯는다. 시인은 가랑비 속에 서서 흘러간 과거의 아련한 노랫소리를 듣는다.

그 노래의 겉은 곡(曲)이지만 속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곡(哭)이기도 하다. '아아' 라는 흔하디 흔한 감탄사가 어찌하여 이 시에서는 가슴을 깨무는 아린 이빨 자국인가. 눈물의 주먹다짐인가.

안도현(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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