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덩샤오핑이 원했던 ‘북한의 덩샤오핑’

중앙선데이

입력

"중앙선데이, 디시전메이커를 위한 신문"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은 노동당 비서 시절인 1983년 6월 닷새간 중국을 방문했다. 첫 방문이다. 김일성 주석의 후계자로 확정된 뒤 중국 지도부와 상견례를 하러 간 자리였다. 최고지도자였던 덩샤오핑(鄧小平)까지 나와 그를 환대했다. 김 위원장은 한창 나이인 41세였다.(아래 사진) 얼굴이나 차림새만 보면 ‘부잣집 도련님’ 같은 인상을 풍긴다. 통치 의욕도 넘쳤던 것 같다. 국내에선 주체사상을 심화시키고 ‘우리식 사회주의’를 주창하며 갖가지 속도전으로 생산현장을 독려했다.

반면 중국은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노선을 본격화하며 변화의 큰 물결을 타기 시작하던 시기였다. 4대 경제특구(선전·주하이·산터우·샤먼)를 만들어 외국 자본을 불러 모으고 사회주의 시장경제를 실험하고 있었다.

그로부터 27년. 사회주의 형제국이자 혈맹 관계인 북한과 중국은 완전히 다른 나라가 됐다. 김 위원장 스스로 2001년 1월 상하이 방문 때 “천지개벽”이라고 말한 대로다. 글로벌 금융위기를 겪으며 중국은 미국과 자웅을 겨루는 ‘G2’ 국가로 떠올랐지만 북한은 외부 지원 없이 보릿고개를 넘기기 어려운 처지다. 불과 한 세대 만이다. ‘주체’에 매달리다 나라를 ‘생존 위기’의 나락으로 떨어뜨린 책임을 누가 져야 할까.

덩샤오핑은 83년 방중한 김 위원장에게 선전 방문을 권했다고 한다. 개혁·개방의 실험 현장을 보여줘 그가 ‘북한의 덩샤오핑’으로 활약하길 원했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김 위원장은 체제 단속을 강화하는 한편 핵·미사일 개발에 집착하며 극좌 노선을 걷고 말았다. 덩의 탄식이 들리는 듯하다.

97년 국방위원장 취임 뒤 김 위원장은 정상(頂上) 신분으로 중국을 네 번 방문했다. 그때마다 국내외 언론은 온갖 추측과 분석을 쏟아냈다. 북·중 관계가 한반도 정세에 미치는 영향이 큰 데다 북한의 자발적인 변화를 기대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김 위원장이 노린 건 중국의 더 많은 원조와 한·미·일을 향한 과시용 제스처였을 뿐이었다.
북·중 관계는 요즘 중대한 변화의 기로에 서있다. 김일성·김정일 시대가 달랐듯 권력세습의 3대(代)째인 김정은 시대에는 그보다 훨씬 큰 변화를 예고한다.

김일성 주석은 중·소 대립의 틈새에서 절묘한 등거리 외교를 구사했다. ‘소련 카드’를 활용해 중국의 지원을 최대한 끌어냈다. 91년 5월까지 39번(공식 방문은 15번)이나 방중한 사실에서 잘 드러난다. 거의 1년에 한 번꼴이다. 그때마다 중국 측에선 부총리급 인사가 압록강 접경도시 단둥까지 나가 영접하는 등 최고의 의전과 환대로 맞이했다. 김 주석은 마오쩌둥과 덩샤오핑을 직접 상대했다. 회담장에서 통역 없이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눈 적도 많았다고 한다. 그런 김 주석에게 92년 한·중 수교는 충격과 배신, 분노의 사건이었다. 김 주석은 94년 7월 사망할 때까지 중국 땅을 다시 밟지 않았다.

장차 열릴 김정은 시대의 북·중 관계는 할아버지와 아버지 때보다 훨씬 버거울 것이다. 국정 경험이 전무하다시피 한 28세의 젊은이가 만신창이가 된 체제를 살리면서 중국과 대등한 외교를 펼칠 것으로 보는 전문가는 거의 없다. 북한 체제의 혼란과 불확실성이 커질수록 중국 지도부의 개입(engagement) 유혹은 커질 수 있다. 중국은 요즘 대북 지원과 진출에 적극적이다. 중국으로선 대만 문제 해결, 한·미 동맹 견제, 한반도 영향력 확대 등의 측면에서 북한의 전략적 효용성을 재발견하고 있다.

한반도가 격동기를 겪을 때면 항상 ‘중국 변수’가 작용했다. 멀리는 삼국통일, 가까이는 6·25전쟁이 그랬다. 김정일 위원장의 방중을 둘러싼 소동은 바로 중국 변수가 남북 분단시대의 상수(常數)임을 말해준다. 김 위원장의 방중 행보 못지않게 중국의 바뀐 자세를 지켜봐야 할 이유다.

이양수 국제 에디터 yasl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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