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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 시평] 도둑의 세상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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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영국에 밀입국하려던 중국인이 밀폐된 트럭 속에서 떼죽음당한 일을 생각한다. 소련과 동유럽 공산체제가 망가져 국경이 구실을 못하게 돼 생긴 참사다.

시장의 세계화는 우선 떼도둑의 세상을 가져왔다. 10년 전 독일 총리 헬무트 콜은 유럽공동체가 국제범죄조직의 소굴이 될 것으로 내다봤다. 그의 내무장관 볼프강 쇼이블레는 닥쳐올 재앙을 열거했다.

***국제범죄조직 소굴 된 EU

마약중독의 폭발적 증가, 통제 불가능한 마약 암거래, 돈 세탁에 직.간접으로 관여하는 은행 시스템, 협박과 공갈.사기의 만연, 특히 무서운 것은 경찰과 사법부의 부패, 그리고 조직범죄에 의한 정치권의 오염 등이다.

이들의 예언은 한치의 차질 없이 적중했다. 이탈리아 시칠리아에 본거지를 둔 마피아는 유럽공동체 열세번째 가맹국에 준하는 막강한 힘을 얻었다. 남미 콜롬비아의 마약재벌, 미국의 갱, 중국 화교의 범죄조직, 새로 등장한 러시아 마피아가 서로 연계해 밤의 세계를 지배할 수 있도록 교두보가 유럽에 생겨났다.

특기할 것은 쇼이블레의 독일이 국제 마피아의 지휘본부가 됐다는 사실이다. 나치의 저주에서 아직도 못벗어나고 있는 독일이 범죄예방과 수사에 절대로 필요한 전화도청은 물론 은행계좌 추적도 몹시 꺼리고 있기 때문이다.

유럽공동체에서 시장과 사이버 공간의 통일은 이뤄졌으나 주권국가의 전통이 강하게 살아 있다. 애국심.국민감정.관료주의.외교관행, 각국의 특징 있는 사법이 그대로 있고, 특히 사생활보호와 인권존중을 신주로 모시고 있다. 이 모든 것을 짓밟는 조직범죄와의 전쟁에서 유럽연합(EU)이 어떻게 이길 수 있는가□

최초의 진짜 마피아 주권국가는 1993년 카리브해의 작은 섬 아루바에 세워졌다. 여기서 열린 국제조직범죄집단 정상회담에서 세계를 몇 개의 블록으로 분할 경략하기로 합의했다. 불가침조약을 해 '마피아의 평화(pax mafiosa)' 를 이룬 것이다.

이것은 곧 세계 규모의 검은 돈 세탁 시스템과 러시아의 대약탈로 그 모습이 나타났다. 수많은 하이에나가 이리떼로 돌변한 소련의 엘리트와 합세해 상처입은 사자를 통째로 뜯어먹기 시작했다. 러시아는 출혈이 멎지 않아 쓰러져 있다.

수천이 넘을 도둑 가운데 희대의 사기꾼을 꼽자면 역시 마크 리치다. 미국에서 사기와 탈세로 3백25년의 징역형을 선고받고 85년에 스위스로 도망, 이스라엘 여권을 가지고 세계를 주름잡는 범법자다. 우라늄.몰리브덴.탄탈룸 등 희금속(稀金屬)을 비롯, 원유와 천연가스를 헐값에 빼내 천문학적 수익을 올려온 그를 빌 클린턴이 사면했다. 나는 클린턴 부부를 리치의 보호자 후견인으로 보고 있다.

10년 전 러시아의 금 보유량은 3천t이었다. 92년 9월에 2백40t이라 하더니 11월에는 1t도 남지 않게 됐다. 러시아의 매국노들이 이 금을 어디에 가져다 놓았을까□ 부산에 와서 몸을 팔고 있다는 러시아 여성들의 소식에 슬픔을 금할 수 없다. 그리고 지난 10년 동안 미국을 비롯, 서방의 경제가 누린 호황과 흥청거림이 결국 러시아의 대 약탈과 사기의 결과가 아닌가 의심하고 있다.

***외국자본 이동 경계해야

한국은 떼도둑으로부터 아직 비교적 안전해 보인다. 북한이 워낙 가난하고 폐쇄돼 있어 국제범죄조직이 끼어들 여지가 없기 때문에 큰 보호장벽 구실을 해주고 있다. 사실상 섬나라와 같은 위치에 있으면서 개방에 뒤지고 있는 것도 도움이 된다. 마약통제에 성공한 것도 특기할 일이다.

사이버 공간으로 넘나드는 외국자본이 검은 돈인지 알 길은 없다. 그러나 현금의 이동은 철저히 추적해 국제범죄단이 끼어들 수 있는 길을 차단해야 한다. 계좌추적을 철저히 해 국내에서 누가 무슨 일을 꾸미는지 투명하게 해야 한다.

야쿠자가 침투해 있는 일본의 정계와 기업, 화교범죄단과 아편범죄조직의 손이 뻗어 있는 대만의 정계를 타산지석(他山之石)으로 삼아야 한다. 요즘 다시 일고 있는 정치인의 계좌추적에 대한 공방을 비상한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고 있다. 여야를 막론하고 석연치 않은 태도를 보이는 정치인들이 과연 그런 검은 돈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고 자신하는지 나는 묻고 싶다.

金相基(在美 정치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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