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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물쇠 열면 또 자물쇠, 11년간 열어도 잘 안 열리네요”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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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호 16면

박세리는 나비스코 챔피언십과 인연이 없다. 그러나 그녀에게 포기란 없다. 팜데저트=신현식 기자

커다란 뿔을 가진 캘리포니아 사막 산양(山羊)의 이름을 딴 빅혼(bighorn) 골프 클럽의 스타벅스 커피숍에서 박세리는 기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창밖에는 사막의 강풍에 메마른 덤불이 굴러다녔다. 피도 눈물도 없는 잔혹한 무법자들의 영화 마카로니 웨스턴 같은 황량한 풍경이었다. 한때 박세리는 기자들에게 이 사막의 바람처럼 건조했던 적이 있다. 그러나 분홍색 셔츠를 입고 웃고 있는 그의 모습에 이제 선인장의 가시 같은 날카로움은 보이지 않았다.

‘그랜드 슬램’ 꿈꾸는 박세리, 나비스코대회 현지 인터뷰

그의 동생 유리씨가 낳은 아이, 박세리 키즈, 새로운 퍼팅 코치 때문에 혼란해서 급격히 늘어난 퍼팅 수 얘기로 정신이 없던 그가 말했다. “그러게요. 내가 좀 그랬죠. 밥알을 몇 개 먹었는지까지도 한국에서는 뉴스가 될 때가 있었으니까요. 누구를 만나서 무슨 얘기 하기가 겁이 났었는데 대회 기간에 이렇게 여유 있게 천천히 커피를 마시면서 얘기를 하다니 세상도 사람도 많이 변하는가 봐요.”

빅혼 클럽은 캘리포니아 남동부의 팜데저트에 있다. LPGA 투어 첫 메이저대회가 열리는 미션 힐스 골프장에서는 약 20분 거리다. 박세리는 이곳에 집을 가지고 있다. 건평 2000평방피트(약 56평) 정도. 성공한 골퍼 박세리에겐 ‘아담한’ 집이다. 원래 안니카 소렌스탐의 집이었는데, 2005년 이곳에서 열린 삼성월드챔피언십에 참가했다가 코스와 집이 아름다워 덜컥 샀다고 한다. 박세리는 플로리다주 올랜도를 투어의 베이스로 삼고 있지만 종종 이곳에서 머물며 대회를 준비한다.

소렌스탐에게서 구입한 집 공개
팜데저트는 캘리포니아 남동부의 사막이다. 미국인들은 이곳에 물을 끌어와 골프 코스와 멋진 집을 지어 럭셔리 휴양지로 만들었다. 빅혼은 그중 최고 부자들의 주택단지다. 미리 약속하지 않으면 외부인은 빅혼에 들어올 수 없다. 98년 US오픈 물속 맨발 샷의 이미지가 강렬해서 그런지 박세리와 사막은 별로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박세리가 팜데저트의 자택 앞에서 환히 웃고 있다.

박세리가 이곳에 집을 산 이유 중 하나는 사막의 태양과 바람에 익숙해져 마지막 남은 메이저 대회의 우승컵을 갖겠다는 의도다. 메이저 5승을 포함해 LPGA 투어 24승을 거둔 그는 메이저 대회 중 유독 나비스코 챔피언십에서만 우승을 못했다. “페어웨이가 좁고 휘어져 있어 거리가 많이 난다고 반드시 유리한 것만은 아니고 모든 게 조화된, 모든 걸 가진 선수만이 스코어를 낼 코스”라고 박세리는 말했다. 박세리는 모든 걸 가졌다. 가지지 못한 것은 나비스코 챔피언십뿐이다.

“자물쇠를 열고 들어가면 또 자물쇠가 있고, 열고 들어가면 또 있고, 11년 동안 그렇게 열고 있는데 아직도 막혀 있네요. 내 손에 아직 열쇠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시간이 많이 남아 있는 것 같지는 않고, 조급하게 서두른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그랜드슬램은 박세리에게 유일하게 남은 목표다. 그는 황량한 민둥산을 배경으로 입과 마음을 열었다. “공식 인터뷰에선 뭐든지 자신 있다고 하는데 속은 그렇지 않아요. 아직도 하루에 20시간씩 골프 생각을 하는데도 내가 과거처럼 정상이 아닌 것이 화가 나고, 특히 나비스코 우승컵 같은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해 아쉬움이 들어요. 박지은의 나비스코 우승요? 부럽죠. 솔직히 말하면 질투심도 나죠. 왜 나에게는 나비스코가 오지 않을까요.”

메이저 8승을 기록한 톰 웟슨(미국)은 PGA 챔피언십에서만은 우승을 못해 커리어 그랜드슬램을 달성하지 못했다. 웟슨은 “다른 메이저 대회 우승 2~3개와 바꿔서라도 그랜드슬램을 하고 싶다”고 했다. 그러나 고물상 리어카에서 엿 바꾸듯 할 수 있는 것이라면 아무도 메이저 우승에 골프 인생을 걸지는 않는다.

“열쇠는 아직도 내 손에 있어”
PGA 투어 최다승 기록인 82승과 메이저 7승을 한 샘 스니드는 US오픈에서는 마지막 홀에서 짧은 우승 퍼트를 번번이 실수하는 징크스가 있었다. 공을 멀리 친다 해서 ‘슬래머’라는 별명을 가진 그는 US오픈 때문에 그랜드 슬래머로는 불리지 못했다. 스니드가 그랜드슬램을 했다면 1912년 동갑내기 라이벌이었던 벤 호건 같은 전설이 됐을 것이다. 그 대신 그는 잊혀지고 있다. 마스터스에서 우승하지 못한 월터 헤이건(메이저 11승)도 그렇다. 그랜드슬램은 그냥 위대한 선수와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선수를 가르는 기준쯤 될 것이다.

박세리도 그 사실을 알고 있다. “안니카 소렌스탐에 필적한다는 낸시 로페스도 US오픈 우승이 없어 그랜드슬램을 못했죠. 그런 거 보면 운이라는 것도 아주 중요한 것 같아요.” 박세리와 치열하게 경쟁했던 소렌스탐과 카리 웹은 그랜드슬램을 했다. 박세리에겐 나비스코 챔피언십 우승 트로피가 필요하다.

물론 박세리에겐 아직도 충분히 기회가 있다. 이전에도 기회는 있었다. 2001년 나비스코 챔피언십 3라운드 중반 그는 선두로 치고 나갔다. 당시 박세리의 뚝심이라면 3라운드에서 리드를 잡으면 사실상 우승이었다. 그러나 15번 홀 더블 보기에 이어 연속 보기를 하면서 밀려났다.

2007년 마지막 라운드도 선두로 출발했다. 긴 슬럼프를 벗어나 명예의 전당 입회를 확정한 박세리가 마지막 남은 목표인 그랜드슬램을 향해 야심 차게 칼을 빼고 나왔을 때다.

사막에 바람이 불지 않으면 매우 덥다. 2007년엔 유난히 더웠다. 상대는 당시 LG 모자를 쓴 신예 수잔 페테르센(노르웨이)이었다. “그랜드슬램이 걸린 대회라 더위와 압박감에 숨이 막혔죠. 그런데 첫 우승을 노리던 페테르센은 더 심했나 봐요. 대단한 슬로 플레이였는데 3명도 아니라 2명이 치는데도 내 인생 가장 긴 라운드였던 것 같아요. 평소 같으면 경기위원이 경고를 하고 벌타도 주었을 상황이었는데 메이저대회 마지막 날 챔피언 조라 그러지 못했던 거 같아요. 골프는 심플한 게 좋아요. 거리, 바람, 핀 위치만 보고 그냥 스윙하는 게 제일 결과가 좋아요. 그런데 계속 시간을 끄니, 짜증이 났어요. 변명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러면서 15번 홀에 접어들었다. 2001년 악몽이 시작됐던 그 홀이었다. “어려운 홀에서는 아무래도 신경을 더 쓰게 되죠. 명확한 타깃을 보고 싶은데 신경을 더 쓴다고 해서 반드시 좋은 결과가 나오지는 않는다는 것이 문제죠.” 그는 2001년처럼 마지막 4개 홀에서 모두 보기를 했다. 페테르센도 무너졌다.

“아일랜드 그린 비슷한 파5 18번 홀에서는 이판사판이란 생각에 2온 공략을 했는데 공이 그린을 넘어 물에 빠졌죠. 우승하고 내가 호수에 빠져야 하는데 공이 빠졌으니….”

더운 사막에서 인생에서 가장 긴 라운드를 벌인 박세리는 얼마나 호수에 빠지고 싶었을까. 약간의 어부지리를 얻은 모건 프리셀이 호수에 몸을 던졌고 페테르센은 옆에서 목놓아 울었다.

박세리는 2라운드까지 6오버파 150타를 쳐 컷을 힘겹게 통과했다. 그러나 선두 김송희(7언더파 137타)와는 13타 차나 벌어져 우승할 가능성은 희박해졌다. 그의 갈증은 깊어만 간다.

“사막에 있으면서 물에 대해 생각하게 됐어요. 98년 US오픈에서 물 속에서의 샷이 박세리의 시작이었다고 보면 나비스코 18번 홀 옆 호수에 빠지는 것은 박세리 골프의 완성이 되는 것은 아닐까 하고요. 그 물속에 들어가면 세례를 받는 느낌이 되지 않을까요.”

미션 힐스의 호수에서 세례를 받게 되면 박세리는 골퍼로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 위대한 골퍼에서 그랜드슬램을 완성한 불멸의 골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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