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진혁칼럼] 권력의 자충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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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우리나라에서 정치인은 탄압을 받아야 성장한다는 말은 대체로 맞는 말이다. 만일 박정희(朴正熙)와 그후의 전두환(全斗煥)이 DJ를 권력으로 낙선시키려 하고, 납치.감금.살해 시도 등 갖은 박해를 하지 않았던들 DJ가 거물이 되고 대통령이 될 수 있었을까.

만일 YS가 박정희의 초산테러.총재직 정지 가처분.의원직 제명이나 20여일의 단식을 부른 전두환의 가택연금 등이 없었던들 거물이 되고 대통령이 될 수 있었을까.

*** 탄압밥으면 정치적 성장

이런 과거를 생각하면 DJ.YS가 뛰어난 점도 있었지만 정치적 탄압이 그들을 성장시키고 '큰 인물' 로 만들어낸 측면도 가히 절대적이라 할 만하다. 이제 와선 그들 두 사람의 국정난맥과 지도력 불신이 죽은 박정희를 부활시키고 있으니 역사는 정말 돌고도는 것인가.

지금도 비슷한지 모른다. 얼마 전부터 나돈 소위 '이회창 대세론' 이란 것은 李총재가 잘났거나 정치를 잘해 나온 것이라기보다 DJ정권으로부터의 반사이익이라는 측면이 더 크다.

만일 DJ정권이 의원 빼가기.꿔주기, 낙하산 인사.법무장관 파동 따위를 하지 않았던들 李총재의 당내 지도력이나 인기가 지금같은 수준으로 유지되긴 힘들었을지 모른다. DJ가 李총재를 많이 키운(?) 셈이다.

이렇게 볼 때 권력운용이란 정말 복잡.미묘한 것이다. 자기를 이롭게 한다고 쓴 권력이 거꾸로 자기에게 독약이 되기도 하고, 상대방의 기를 죽이자고 한 노릇이 오히려 상대를 크게 키워주는 결과가 오기도 한다.

지금 여당에서도 바로 그와 비슷한 사례가 현재진행형으로 전개되고 있는 것 같아 관심을 갖게 만든다. 이른바 정풍파(整風派)에 대한 DJ의 처리방식이 그런 관점에서 관심을 끄는 것이다.

DJ가 하기에 따라 정풍파의 정치자산은 더욱 커질 수도 있고, 특히 정동영(鄭東泳)씨 같은 사람을 키워주는 결과가 될 수도 있다. 鄭씨는 권노갑(權魯甲)씨 퇴진을 제기한 데 이어 이번에 다시 정풍운동에 나서 주가를 높였다.

그러나 그를 더 주목받게 만든 것은 그에 대한 권력의 냉대와 '왕따' 였다. 이번에도 그와 그의 동료들은 집권 수뇌부와 동교동계로부터 압박받고 당내에서도 고립되는 등 어려운 처지에 빠졌다고 한다.

무엇보다 DJ가 '충정' 을 이해한다고 하면서도 정풍파의 뜻을 받아들일지 여부가 의심스럽다는 사실이 정풍파에 대한 사람들의 동정과 관심을 유발하는 것 같다. DJ는 가뭄을 이유로 예정된 국정쇄신 기자회견을 연기했는데 글쎄, 가뭄 때문에 국정쇄신책의 발표를 늦춰야 하는지는 선뜻 납득하기 어렵다.

오히려 자연의 가뭄에 더해 오랜 경제침체.정치불안으로 바싹 말라붙은 민심의 해갈을 위해서라도 시원한 국정쇄신책은 이르면 이를수록 좋지 않겠는가.

만일 이번에도 국정쇄신을 한다면서 본질은 빼버리고 수사(修辭)로만 적당히 넘어간다면 정풍의 필요성과 그 대의명분은 더욱 강화되고 치열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정풍운동은 재연될 게 뻔하고 그 주역은 다시 한번 '이름을 날릴' 상황을 맞을 공산이 크다.

그런 정풍파가 밉다고 그들을 박대하고 입을 틀어막으려 한다면 그럴수록 그들의 인기는 올라가고 정치적으로 성장할 것도 틀림없는 일이다. 정풍파를 키우기 싫다면 오히려 과감한 국정쇄신을 함으로써 그들을 권력체제의 한 요소로 편입시키는 것이 정치적으로 훨씬 더 현명한 방법일 것이다.

*** DJ 쇄신요구처리 주목

만일 국정쇄신 미흡으로 정풍파가 권력과 대립함으로써 국민 시선을 사로잡는 상황이 오래 가면 국민 점수는 정풍파가 다 따고 다른 예비주자나 충성파는 상대적으로 불리해질 수 있다는 점에서 집권측의 대선전략에도 차질이 올 수 있다.

가뭄으로 시간을 번 DJ가 어떤 선택을 할는지 속단할 수는 없다. 과거 박정희가 본의 아니게 자기와 YS를 키웠듯 자기도 야당의 李총재나 당내의 정풍파를 키우는 정치를 해나갈지, 아니면 이번 기회에 자신과 국정의 과감한 쇄신을 통해 남은 임기의 성공적 마무리로 나갈지, 중대한 갈림길에 섰다고 하겠다.

역사에서 보면 많은 권력이 외부가 아닌 내부 요인으로 기울기 시작한다. 권력이 스스로 적응력과 자기 갱신력을 잃으면 불행이 시작된다. 우리 현대사도 마찬가지다.

역대정권이 야당이나 비판세력 등 외부의 공격 때문이 아니라 내부의 권력관리.권력운용의 실패로 불행한 종말을 맞았다. 권력 스스로의 악수(惡手).자충수를 경계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송진혁 논설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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