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들의 법정투쟁을 도운 공로로 2004년 일본인 최초로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받은 후세 다쓰지. “선생님은 우리 조선인에게 정말로 아버지, 맏형 같으며, 구원의 배와 같은 귀중한 존재였습니다.” 1953년 하늘로 돌아간 그의 영전에 바친 조사의 한 구절이 잘 말해주듯이, 한국인의 가슴에 그는 ‘한국판 쉰들러’로 살아 숨쉰다.
그는 계급해방을 민족문제 해결의 지름길로 본 ‘일본 무산운동의 맹장’이었지만, 계급의식에 함몰된 편협한 사회주의자가 아니었다. 이 점은 조선공산당 사건(1927년)을 민족 전체의 저항으로 여긴 그의 시각이 웅변한다. “공산당사건의 진상은 총독정치의 폭압에 반항할 수밖에 없는 조선동포 전체의 사건이다. 법정에 서 있는 100여 명의 피고는 총독정치의 폭압에 반항하는 조선동포를 대표한 최전선의 투사가 적의 포로가 된 것이라고 여겨진다”(『해방』7-1, 1928년). 그렇기에 그는 자신과 정치적·사상적 지향을 달리하는 의열단원 김지섭의 ‘폭발물취체벌칙위반사건’(1924년)이나 천황 폭살을 꾀한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의 ‘대역사건’(1926년) 등의 변호도 맡았다.
“식민지 산업에 대한 근본적인 의혹은 아무리 산업이 발달하고 농업시설이 개선되어도 그것이 식민지 동포를 위한 것이 아니라는 점에 있다. 총독부의 정치는 경찰력을 동원한 일본 본위의 정치이기 때문에 식민지 산업의 수확은 본국으로 이송되고 있다. 나는 소위 식민지 정책이란 것에 대해 반대함과 동시에 식민지 동포와 함께 해방을 바라고 있다.” 식민지 지배의 본질을 꿰뚫어 보고 우리 민족의 독립 되찾기를 희구한 그의 삶은 더불어 살기를 꿈꾸는 한·일 두 나라 시민사회의 앞길을 비추는 희망의 기억으로 다가선다.
허동현 경희대 학부대학장·한국근현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