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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 지지한 일본인 인권변호사 후세 다쓰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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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독립운동가들의 법정투쟁을 도운 공로로 2004년 일본인 최초로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받은 후세 다쓰지. “선생님은 우리 조선인에게 정말로 아버지, 맏형 같으며, 구원의 배와 같은 귀중한 존재였습니다.” 1953년 하늘로 돌아간 그의 영전에 바친 조사의 한 구절이 잘 말해주듯이, 한국인의 가슴에 그는 ‘한국판 쉰들러’로 살아 숨쉰다.

일본인이길 부끄러워한 일본의 양심. 암울한 일제 치하 피압박 식민지 사람들의 손을 잡아준 인권변호사 후세 다쓰지(布施辰治, 1880~1953). “박애의 이상 아래 약육강식의 현실을 없애고 이를 실행할 철학을 갖기 위해서는 학식과 장기간의 공부가 필요하다.” 약자 편에 서기 위해 법학을 배운 그는 변호사의 길을 택했다. 1911년 ‘조선독립운동에 경의를 표한다’는 글을 발표할 만큼 조선의 독립운동을 지지했던 그는 1919년 2·8독립선언을 이끈 최팔용과 백관수의 법정투쟁을 도운 것을 계기로 일본 내 노동운동, 농민운동, 수평운동은 물론 ‘조선인의 이익을 위해 투쟁하는 사건’에도 직접 나설 것을 천명했다. “앞으로 ‘사회운동에 투졸(鬪卒)한 변호사로 살아나갈 것을 민중의 한 사람으로서 민중의 권위를 위해 선언한다. 나는 주요 활동장소를 법정에서 사회로 옮기겠다”(‘자기혁명의 고백’, 1920년). 차별받는 민중을 위한 변호사를 자임한 그에게 민족은 걸림돌이 되지 않았다. “한일합방은 어떠한 미사여구로 치장하여도 실제로는 자본주의적 제국주의의 침략이었다. 조선민중의 해방운동이 통절하게 우리 일반 무산계급의 마음을 울리고, 조선민중이 철저한 무산계급 해방운동을 전개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적기』, 1923년)

그는 계급해방을 민족문제 해결의 지름길로 본 ‘일본 무산운동의 맹장’이었지만, 계급의식에 함몰된 편협한 사회주의자가 아니었다. 이 점은 조선공산당 사건(1927년)을 민족 전체의 저항으로 여긴 그의 시각이 웅변한다. “공산당사건의 진상은 총독정치의 폭압에 반항할 수밖에 없는 조선동포 전체의 사건이다. 법정에 서 있는 100여 명의 피고는 총독정치의 폭압에 반항하는 조선동포를 대표한 최전선의 투사가 적의 포로가 된 것이라고 여겨진다”(『해방』7-1, 1928년). 그렇기에 그는 자신과 정치적·사상적 지향을 달리하는 의열단원 김지섭의 ‘폭발물취체벌칙위반사건’(1924년)이나 천황 폭살을 꾀한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의 ‘대역사건’(1926년) 등의 변호도 맡았다.

“식민지 산업에 대한 근본적인 의혹은 아무리 산업이 발달하고 농업시설이 개선되어도 그것이 식민지 동포를 위한 것이 아니라는 점에 있다. 총독부의 정치는 경찰력을 동원한 일본 본위의 정치이기 때문에 식민지 산업의 수확은 본국으로 이송되고 있다. 나는 소위 식민지 정책이란 것에 대해 반대함과 동시에 식민지 동포와 함께 해방을 바라고 있다.” 식민지 지배의 본질을 꿰뚫어 보고 우리 민족의 독립 되찾기를 희구한 그의 삶은 더불어 살기를 꿈꾸는 한·일 두 나라 시민사회의 앞길을 비추는 희망의 기억으로 다가선다.

 허동현 경희대 학부대학장·한국근현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