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 포럼] 정동영과 김민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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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과연 민주당 정풍(整風)파동의 승자는 누구인가? 잣대에 따라 다른 평가가 나올 수 있겠지만 당장 눈에 띄는 이는 정동영(鄭東泳)최고위원이다.

당내 최대 파벌 동교동계와는 골이 더욱 깊어졌지만 개혁파 리더로 부상하며 국민에겐 강한 인상을 심어줌으로써 명실공히 '참신한 중진' 으로 자리매김했다.

반면 동교동계는 생각지도 못한 뒤통수 피습으로 중상이고, 그 쪽을 육탄으로 방어하던 김민석(金民錫)의원도 개혁 이미지에 큰 흠집을 남겼다.

이번 사태를 지켜보며 가장 궁금한 게 金의원의 행동이다. 386세대의 리더격으로 젊은 층의 반란을 주도할법한 그가 오히려 정풍파를 역공하고 나섰으니 선뜻 이해가 되지 않는다. 오죽했으면 또래 의원들이 "배신감까지 느꼈다" 고 했겠는가. 왜 그랬을까? 그가 내세운 명분은 절차의 중요성과 조직논리로서의 신의로 요약된다.

그는 정풍파 의원들이 주장한 쇄신의 필요성은 인정하지만 "절차의 정당성도 간과돼선 안되며, 동지들간의 약속과 신의는 지켜져야 한다" 고 역설했다.

정당한 절차야말로 민주주의를 유지해 나가는 데 필수적인 요소다. 과정과 절차가 무시되는 데서 숱한 굴절을 맛봐야 했던 의정사 편린들을 되돌아볼 때 절차 지키기는 나름대로 무게를 지닌다.

그러나 金의원이 주장한 절차는 민주주의의 형식적 요건으로서의 절차가 아니라 단순히 조직의 상하논리에 불과하다. 동지들끼리의 신의도 물론 지켜야 할 중요 덕목이긴 하나 국가적.사회적 대의와 충돌할 때 어느 쪽을 희생시켜야 할 것인지는 자명하다.

정풍파들의 주문은 안동수(安東洙)전 법무장관 추천자 문책요구에서 출발했지만 그 핵심은 대통령의 국정운영 전반에 대한 불만이다. 金의원의 지적대로 소장 의원들이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을 면담했다고 가정해보자.

과연 그같은 불만과 건의사항이 효과적으로 개진되고 수용될 수 있었을까. 열흘 넘게 나라를 시끄럽게 흔들어 놓은 정풍파의 충격요법에도 쇄신책의 가닥조차 잡히지 않고 있는 현재의 모호한 상황을 돌아볼 때 대답은 극히 회의적일 수밖에 없다.

워크숍 이후의 金의원 행보는 더욱 납득되지 않는다. 성명 발표가 약속위반이라느니, 당기위원회에서 조사를 하자느니 하는 것이야말로 본질과는 동떨어진 문제제기다. 자칫 지엽에 매달려 본질을 흐리게 한다는 지탄을 받을 수 있다.

일부에선 동교동계의 정치적 후원을 계산에 넣은 행동이라느니, 경쟁심리에서 그랬느니 쑥덕대는 모양이나 어쨌든 큰 것과 작은 것을 혼동한 의제설정상 오류가 엿보인다. 정동영.김민석 두 사람이 당내 소장그룹 리더를 다투는 라이벌이라면 민심읽기와 대세판단에서 이번엔 金의원이 한수 밀린 셈이다.

민주당으로선 득인가, 손해인가. 최소한 金대통령이 "민주적인 방법과 이성적인 토론으로 대화를 진행하며 의견을 모은 것은 민주 정당의 모습을 보인 것으로 높이 평가" 한 만큼의 이득은 본 셈이다.

'강한 정부.강한 여당' 을 내세우며 정부.여당이 보여준 그동안의 정치는 사실 민심의 주파수와는 동떨어진 나홀로 정치였다. 의원 꿔주기와 구차한 DJP+α, 힘있는 자리의 호남 독식 시비와 끊임없는 낙하산 인사, 언론사 세무조사 등 억지논리와 무리수가 이어지는데도 여권 내부에선 잘못됐다는 이의제기가 없었다.

이번 정풍파동은 잘못을 지적하는 언로가 살아 있음을 확인했다는 점에서 의미있고, 잘못이 고쳐질 수 있는 가능성이 남아 있다는 점에서 기대를 모으게 하는 것이다. 이제 쇄신책의 내용에 따라 민주당은 정풍의 가장 큰 수혜자가 될 수도 있고, 거꾸로 분열의 상처만 깊어져 심각한 타격을 받을 수도 있다.

대통령은 어떤가. 여권 내부엔 金대통령이 가장 큰 피해를 보았다며 송구스런 표정을 짓는 이가 많다. 정풍파 주문의 궁극적 과녁이 대통령이며, 의원들의 반란 자체가 레임덕의 징표일 수 있다는 점에서 이해가 간다.

金대통령은 법무장관 인사파동의 책임을 '내 탓이오' 라고 시인한 셈이니 그에 따른 권위 손상도 없을 수 없다. 그러나 분위기는 얼마든지 반전될 수 있다. 파동의 한복판에서 한광옥(韓光玉)청와대 비서실장은 "뽕잎을 누에가 먹으면 비단, 뱀이 먹으면 독이 된다" 고 했다.

정풍파동도 쇄신책의 내용에 따라 대통령에게 보약이 될 수도 있고, 해(害)가 될 수도 있다. 만약 지난해 가을처럼 약속한 국정쇄신책 대신 힘의 정치가 구사되는 상황이 재연된다면 그 건 대통령에게도 불행이요, 국가적으로도 불행이 아닐 수 없다.

허남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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