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위기 딛고 선 기업들 <8> 화승그룹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경제 02면

고영립 화승그룹 회장이 경남 양산시 교동의 화승R&A 공장에서 자동차 브레이크 호스 생산 라인을 살펴 보고 있다. 이 호스는 국내 자동차 회사에 이어 독일 벤츠에 납품이 확정된 제품이다. [송봉근 기자]

1980년대 ‘르까프’ 운동화로 부산 신발산업을 이끌었던 화승그룹이 자동차 부품을 위주로 한 정밀화학 업체로 변신해 재도약하고 있다. 화승은 80년대 중반까지 탄탄대로를 달렸다. 신발 수출 하나로 재계 랭킹 22위(매출액 기준)까지 올랐다. 지금도 부산·경남지역을 대표하는 기업 가운데 하나지만, 당시는 이 지역 경제를 좌우할 정도로 위세가 대단했다.

그러나 화승은 98년 외환위기 때 그룹이 문 닫을 위기를 맞았다. 인건비가 오르면서 주력인 신발사업이 침체된 데다 금융·제지·전자로 무리하게 사업을 다각화했던 게 화근이었다. 빚이 눈덩이처럼 불어났고 자금경색이 심화돼 모기업인 ㈜화승이 98년 흑자 부도를 냈다. 그룹 주력사들이 대부분 화의(和議)에 들어갔다.

이때부터 고영립 회장이 그룹 경영을 맡았다. 1200명이던 직원을 300명으로 줄이고, 제지·전자 등 본업에서 벗어난 사업은 과감히 정리했다. 그 결과 2005년 1월 화의에서 벗어났고, 98년 8400억원이던 그룹 매출은 지난해 2조6686억원으로 늘었다. 국내외 22개 계열사를 두고 있는 화승그룹은 올해 매출이 3조원을 넘을 전망이다.

◆자동차 부품사업으로 재기=화승그룹의 재기에 효자 노릇을 한 회사는 자동차 부품업체인 화승R&A다. 이 회사는 화승이 한창 잘나가던 80년대 초 자동차 부품사업부를 분사해 설립했다. 신발 사업이 호황일 때 미래에 대비해 별도 법인으로 키운 것인데, 이후 자동차 산업의 호황을 타고 함께 성장했다. 그러고는 외환위기 이후 그룹이 위기에 처했을 때 버팀목이 됐다.

화승R&A는 자동차용 고무 창틀, 파워스티어링 호스 등 고무제품을 만든다. 고무 창틀은 자동차 트렁크 등 차체와 창문에 장착해 누수·외부소음·먼지 등을 차단하는 부품이다. 60도 이상의 고온이나 습기·폭설에서도 변화가 없어야 한다. 품질을 인정받아 2003년부터 도요타·폴크스바겐·크라이슬러 등 내로라하는 자동차업체에 납품하고 있다. 강윤근 자동차 본부장은 “2003년 도요타 렉서스에 제품을 수출한 이래 불량·결품률이 0%”라며 “자동차 부품사업은 안정적으로 매출을 올릴 수 있는 데다 이익이 나기 시작하면 빠르게 늘어나는 매력이 있다”고 말했다. 올해 매출은 1조원을 넘길 전망이다. 그룹 매출의 35% 안팎에 달한다.

화승R&A의 약진에는 노사 화합이 밑거름이 됐다. 2007년 납품가 인하 등의 여파로 분기 첫 적자를 냈다. 그러자 노조는 그해 4월 ‘노사 한마음 대회’를 열어 임금을 동결하고, 감원 등 구조조정 권한을 경영진에 위임한다는 결의문을 회사 측에 전달했다. 고영립 회장은 당시를 회상하면서 “도요타 노조가 1970년대에 회사에 파업권을 반납한 것과 비견할 만한 일”이라며 “이때 구조조정한 게 재도약의 밑거름이 됐다”고 말했다.


◆미래 먹을거리를 찾아라=우여곡절을 겪으면서 화승은 난관을 헤쳐나갈 인재를 확보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사실을 절감했다. 그래서 2006년 서울 서초동에 사무소를 냈다. 지방 근무자만 뽑아서는 우수 인재를 채용하는 데 한계가 있어서다. 서울 사무소에는 ‘미래경영전략팀’을 두고, 외부 인재를 스카우트해 신수종 사업 전략을 짜고 있다.

화승은 그동안 주력사업으로 ▶자동차부품 ▶스포츠패션 ▶정밀화학 세 분야에 집중해 왔다. 앞으로는 새 먹을거리를 찾겠다는 생각이다. 2020년까지 그룹 전체 매출 목표를 10조원으로 정하고 ▶친환경 항균 바이오 ▶복합소재(기존의 금속재료를 대체하는) ▶중남미 자원개발 등 세 가지 신규 사업에 주력할 방침이다. 지난달에는 부산에서 미국 조지아공과대학과 양해각서(MOU)를 체결했다. 향후 10년간 5000억원을 투자해 나노기술이 접목된 열전소자(열에너지와 전기에너지를 바꾸는 반도체)를 제조할 계획이다.

국내에선 경쟁력을 유지할 수 없는 신발 공장은 모두 해외로 나갔다. 2003년 9월 가동을 시작한 베트남 신발공장은 월 100만 켤레의 리복 신발을 생산한다. 단일 신발공장으로는 세계 최대 규모다. 가동 1년6개월 만에 흑자를 낸 이 공장은 올해 2000억원 매출을 예상한다. 고 회장은 “르까프는 화승을 대표하는 고유 브랜드”라며 “앞으로 중국·유럽 백화점을 중심으로 신발과 스포츠 패션 판매를 확대할 것”이라고 말했다.

글=김태진 기자
사진=송봉근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