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바다로 뛰어든 부사관, 구명정 잡아 동료 구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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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령도 해상에서 침몰한 천안함 승조원들이 비상탈출을 위해 탔던 것으로 보이는 구명정이 28일 인천시 옹진군 해변에 밀려와 있다. 사고 해역 주변에는 이 같은 구명정 10여 척이 떠다니고 있다. [옹진군청 제공]

26일 밤의 백령도 서남해상. 해군 초계함 천안함이 두 동강 난 이 바다에서도 한 해군 병사의 영웅담이 있었다. 아직 이름도 확인되지 않은 이 병사는 침몰해 가는 함상에 고립된 동료들을 위해 자기 몸을 돌보지 않고 차가운 바닷속으로 몸을 던져 구조 활동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당시 현장에서 구조 활동을 폈던 인천시 옹진군 227호 어업지도선 김정석(56) 선장의 말이다. 그는 이날 오후 10시쯤 군청으로부터 구조 출동 연락을 받았다. 선원들 대부분이 선상 생활을 하고 있어 바로 백령도 용기포항을 출항할 수 있었다. 227호는 다른 2척의 지도선과 함께 20여 분 만에 사고 해역인 연화리 앞 1.8㎞ 해상에 도착했다. 칠흑 같은 어둠에 묻힌 사고 해역은 아수라장이었다. 천안함은 함미가 잠긴 채 오른쪽으로 크게 기울어져 있었다. 이미 퇴함 명령이 내려져 있었지만 수십 명의 천안함 승조원은 함교 앞 현등 주위에 몰려 추위와 불안에 떨고 있었다. 해군 고속정들이 먼저 도착해 있었지만 파도와 바람이 거세 함정에 접근조차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고 해역에는 천안함에서 떨어뜨린 구명정이 10여 개 떠다니고 있었다. 고무로 만들어져 팽창식 뗏목이라고도 불리는 이 구명기구는 퇴함 시 병사들이 옮겨 타기 쉽게 만들어져 있다. 그러나 천안함에서 내려진 구명정들은 파도에 밀리고 서로 뒤엉켜 천안함과는 갈수록 멀어지고 있었다.

김 선장은 “30년 이상 배를 탔지만 막상 침몰해 가는 군함과 위기에 몰린 병사들을 대하니 정신이 아득했다”고 말했다. 이때 천안함 함교에서 한 병사가 차가운 바닷속으로 다이빙하듯 뛰어드는 장면이 목격됐다. 이 병사는 날렵하게 차가운 바다를 헤엄치며 구명정들을 천안함 쪽으로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이 병사의 영웅적인 행동으로 추위와 바람에 떨던 천안함 병사들은 차례로 구명정으로 옮겨 탄 뒤 고속정의 구조를 받았다. 구조 활동이 본격화되자 김 선장은 이 병사를 어업지도선으로 끌어올렸다. 차가운 바닷물 속에서 10여 분 이상 헤엄을 친 탓인지 온몸이 새파랗게 얼어 있었다.

즉시 선실로 데려가 더운 물로 샤워부터 시켰다. 배에 남은 선원들의 옷으로 갈아입히고 다시 모포로 온몸을 감싸 줬다. 경황이 없어 누구인지도 자세히 알아보지 못했다. 김 선장은 “천안함의 전탐조 소속이라는 얘기만 들었고 계급장을 보니 중사나 상사쯤으로 보였다”고 기억했다. 천안함에는 전탐장 이하 7명의 전탐원이 근무하고 있다. 김 선장은 이 병사를 빨리 후송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다시 천안함으로 접근해 부상이 심한 병사 한 명을 더 태웠다. 그 병사는 머리를 다쳤는지 얼굴에 피가 흐르고 있었다. 2명의 병사를 태운 227호 어업지도선은 바로 용기포항으로 출발했다. 46t인 이 배가 사고 해역에서 가장 기동력이 있고 천안함 접근이 쉬웠기 때문에 긴급 후송이 필요한 두 병사를 맡은 것이다.

용기포항에 도착하니 군 앰뷸런스가 대기하고 있었다. 김 선장은 “앰뷸런스에 인계할 때 동료들을 위해 바닷속으로 뛰어든 그 병사에게 거수경례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고 말했다. 227호 어업지도선은 두 병사를 군 의무대에 인계한 뒤 다시 사고 해역으로 돌아가 이튿날 오전 3시까지 나머지 수색 작업에 참가했다. 어업지도선은 북방한계선(NLL) 해상에서 어선들이 어로한계선을 넘지 못하도록 지도하는 일을 맡고 있으며 백령·대청도 해상을 3척이 활동하고 있다.

◆부상 병사 혼신을 다해 치료한 공중보건의=인천시 옹진군 대청도 대청보건지소 공중보건의 김현수(26)씨도 구조된 장교와 사병들 치료에 혼신의 힘을 다했다. 그는 26일 오후 10시 “비상 상황이니 보건소에서 대기해 달라는 해군의 요청을 받았다. 대청보건지소는 300가구가 모여 사는 대청도의 유일한 의료기관이다. 자정이 넘으면서 구조된 승조원 한 명이 목과 허리에 통증을 호소하며 들것에 실려 왔다. 이어 6명의 사병이 부축을 받으며 지소로 들어왔다. 생명이 위독할 수 있는 중상자는 2명이었다. 그는 진료실로 옮길 시간도 없어 대기실 바닥에 매트리스를 깔고 중상자부터 진료했다. 27일 0시40분. 수송용 헬기가 중상자 2명을 국군수도병원으로 긴급 후송했고 그는 다시 경상자들을 진료했다. 오전 2시쯤 나머지 승조원은 선진항에서 함정을 타고 백령도로 떠났다. 그는 “의사 생활 중 가장 긴박했던 2시간40분이었다”고 회고했다.

백령도 =정기환·강기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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