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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스토리텔링과 정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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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경제활동과 설득. 큰 연관 없어 보이는 둘의 관계에 주목한 이는 미국의 경제학자 디어드러 매클로스키다. 그는 1999년 발표한 논문에서 미국 국민총생산(GNP)의 28%가 홍보와 마케팅 같은 상업적인 목적의 설득 행위와 관련 있다고 추산했다. 또 판매와 같은 설득 행위에서 스토리텔링, 즉 잘 만들어진 이야기를 들려주는 일이 차지하는 비중을 돈으로 환산하면 3조 달러 이상이라고 주장했다. ‘이야기가 물건을 판다’는 얘기다. 최근 기업들이 상품이 아니라 ‘스토리텔링 마케팅’에 열 올리는 걸 보면 매클로스키가 영 잘못 짚은 건 아니지 싶다.

이야기가 물건을 판 사례는 많다. 조지 오웰의 『1984』를 빌려온 84년 1월의 매킨토시 컴퓨터 광고도 그랬다. 한 여성이 커다란 쇠망치를 휘두르며 ‘빅 브라더’에 억압당하는 노동자들을 해방시키는 내용이었다. 제품은 단 한 번도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스티브 잡스의 ‘썰’은 먹혔다. “컴퓨터를 매니어들의 장난감이나 아이들의 학습도구라고 생각하는가? 컴퓨터는 혁신의 도구다. 매킨토시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이 광고는 엄청난 반향을 일으키며 매진 열풍으로 이어졌다.

하긴 잡스가 종종 비견되곤 하는 예수도 이야기의 귀재였단다.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 말씀 중 3분의 1이 예화(例話), 즉 이야기를 사용한 것이라고 하니.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는 건 율법에 어긋난다”던 까탈스러운 바리새인들의 입을 예수는 이야기로 틀어막았다. “양 한 마리가 구덩이에 빠졌을 때 안식일이라는 이유로 구하지 않겠느냐? 사람은 양보다 더 귀하다”면서(마태복음 12장 11절).

최근 건강보험 개혁법안을 통과시킨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이야기가 갖는 설득력이 정치 리더십에서도 발휘될 수 있음을 입증했다. 건보개혁을 추진하면서 그는 어머니 이야기를 누누이 강조했다. 외국에서 자라는 아들이 영어를 잊을까봐 새벽 4시에 깨워 공부를 시키던 그 헌신적인 싱글맘이, 난소암에 걸려 죽으면서도 건보회사와 싸우며 병원비를 걱정했다는 안쓰러운 사연은 듣는 이의 감성을 팍팍 자극했다. ‘제대로 된 나라라면 전 국민 의료보장은 당연한 것’이라는 설득을 이끌어낸 데는 이렇게 사실을 감동적으로 포장한 스토리텔링의 힘을 간과할 수 없다. 결론. 이야기는 물건도 팔지만, 임자를 잘 만나면 엄청난 변화를 이끌어내는 촉매제가 되기도 한다. 그 정도로 위력적이다.

 기선민 문화스포츠 부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