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한 국책사업…] 1. 대충 입안 졸속 추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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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온나라가 과거에 졸속으로 결정해 추진한 국책사업의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 이제라도 계획단계에서 사후 평가에 이르기까지 국책사업의 큰 틀을 바꾸지 않고는 '제2의 시화호.새만금' 이 줄줄이 터져나올 수밖에 없다는 게 전문가들의 한결같은 지적이다.

◇ 대형사업 실패는 국가위기=국책사업 자체가 첨단화.대형화.장기화하면서 사업비는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다. 신항만.인천국제공항에는 이미 쏟아부은 돈 말고도 앞으로 각기 24조원, 4조7천억원이 더 들어가야 한다. 경부고속철도를 합칠 경우 이 3개 사업에만 우리나라 한해 예산의 절반이 필요하다.

충북대 황희연(도시공학)교수는 "대형 국책사업의 부실은 세금 낭비는 물론 국가경제의 파탄을 불러올 우려가 있다" 면서 "정부가 장기적 안목에서 각종 사업을 망라한 종합적인 밑그림을 그려야 한다" 고 지적했다.

◇ 사업 성공은 갈수록 '좁은 문' =해양수산부는 지난해 부산 다대포항을 신항만으로 개발하기로 하고 올해 실시설계 예산(32억원)을 배정했다. 그런데 부산시가 이미 바닷가 턱밑까지 25층짜리 아파트를 짓게 허가해 주었고, 주민이 항만 건설을 강력히 반발해 설계에 들어가지 못했다.

중앙.지방정부간 생각이 엇갈렸기 때문이다. 국책사업의 덩치가 커진 반면 성공하기는 과거보다 훨씬 더 어려워졌다. 전경련 신종익 규제조사본부장은 "1960~70년대엔 통치권자의 말 한마디면 일사천리로 진행될 수 있었으나 이젠 시대.환경이 바뀌었다" 며 "대역사(大役事)를 하려면 효과는 물론 부작용에 대해서도 사전에 충분한 검토를 하고 이를 바탕으로 국민적 합의부터 이끌어내야 한다" 고 말했다.

◇ 결정하면 일관성 있게 추진해야=정치권과 시민단체, 지역민의 이해가 충돌해 사업을 하는 과정에서 계획이 수시로 바뀌는 것도 부실을 부추기는 고질적인 문제점이다.

2백32차례나 설계변경된 경부고속철도의 노선이 그 대표적 사례다. 90년 6월 대전과 대구 역사는 지하노선으로 계획을 세웠으나 예산 절감을 이유로 지상으로 바뀌었다가, 주민의 민원이 빗발치자 지하노선으로 다시 변경된 뒤 여지껏 논란이 일고 있다.

고속철도공단 관계자는 "정치논리와 주민 반발에 따라 설계방침이 오락가락하면서 공기는 3년, 사업비는 1조4천억원 이상 늘어났다" 면서 "기왕 계획을 세웠으면 외풍에 흔들려 사업이 어려워지는 사태를 막아야 한다" 고 하소연했다.

◇ 개발만큼 환경도 중요=대규모 사업의 경우 사전에 환경성 검토를 의무적으로 받도록 한 환경정책기본법 시행령이 지난해 8월에야 시행됐을 만큼 그동안 진행된 국책사업은 환경문제에 대한 고려가 미흡했다.

건설교통부는 95년 경인운하 건설계획을 확정하고 98년엔 현대건설 등을 사업시행자로 지정했으나 환경단체의 반발이 거세지자 지난해 6월에야 환경부와 환경영향평가에 관한 협의에 나섰다. 이 바람에 착공시기가 미뤄지면서 사업 여부조차 불투명해졌다.

서왕진 환경연대 사무처장은 "국토를 개발할 때는 환경평가를 먼저 한 뒤 이를 토대로 사업시행 여부를 결정하는 원칙을 세워야 한다" 고 지적했다.

◇ 실패한 사업엔 책임을 물어야=그동안은 국책사업이 실패해도 책임을 묻지 않았다. 시화호의 경우 물이 썩어들어가자 96년 감사원이 특별감사를 했으나 중.하위직 공무원 18명을 징계하는데 그쳤다. 환경부 장.차관과 수자원공사.농어촌진흥공사 사장 등 10여명이 검찰에 고발됐으나 98년 '혐의 없음' 결정을 받은 뒤 이 문제는 흐지부지됐다.

환경운동연합의 여영학 변호사는 "사후에는 혐의를 입증하기 힘들기 때문에 추진과정에 관한 기록을 남기고 이를 평가하는 시스템을 도입해야 한다" 고 제안했다. 대형 국책사업별로 백서 발간을 의무화해 주요 계획의 결정.입안.시공.감리책임자에 대한 기록을 남겨야 한다는 것이다.

기획취재팀=민병관.전영기.이규연.최상연.정경민.신예리.김기찬.김현기.이상복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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