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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와 과학의 인간화 이뤄져야 이상 사회 열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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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호 31면

류승국 박사는 “봉건시대에도 언로(言路)가 강조됐으며 국가의 흥망이 언로가 막혔느냐 열려 있느냐에 달렸다”고 강조한다. 신동연 기자

개방은 좋은 것이다. 금지하는 것, 경계하는 것을 열어 자유롭게 드나들고 이용하게 하면 놀라운 결과가 있다. 중국이 수십 년 내에 세계 패권을 차지하게 될지도 모르게 된 것도 결국 개방 덕분이다. 우리가 북한에 적극 권유하고 있는 것도 개방이다.
종교적으로도 개방은 좋은 것일까. 모든 종교에는 교리라는 테두리가 있다. 교리의 테두리 안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에도 놀라운 즐거움이 있고, 깨달음이 있고, 진리에 다다르게 하는 힘이 있다.

영혼의 리더<42> 한국 유학 이끄는 류승국 학술원 회원

대한민국학술원 회원인 류승국(87) 박사는 영성과 학문의 세계에서도 개방성이 좋다는 것을 증명하는 사례다. 한국 유학의 대가인 류 박사는 유학의 범주에 가둬놓기 힘든 사상적·철학적 차원에 도달했다. 그는 동서철학을 아우르고자 불교철학과 서양철학을 공부했다.

유교의 경계 넘은 석학
충북 청원에서 태어난 류승국 박사는 성균관대 동양철학과를 졸업(1952년)하고 동 대학교 대학원에서 철학박사(75년) 학위를 받았다. 류 박사는 60년부터 88년 정년퇴임 때까지 성균관대 동양철학과 교수로 재직하며 열정적인 강의와 지도로 제자들을 키워냈다. 그 사이 성균관대 유학대학장, 도서관장 겸 박물관장 등 보직을 겸임했으며 대한민국학술원 정회원에 추대되고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원장을 지냈다. 정년퇴임 이후에는 경희대 평화복지대학원 원장, 재단법인 동방문화연구원 대표이사, 율곡문화원 원장 등으로 활동했다.

동서철학을 두루 공부한 류승국 박사는 갑골학과 금석학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한국과 중국의 문헌을 탐구해 한국 철학 사상의 정립에 주력했다. 화해와 상생과 통일, 유교 인도주의, 세계평화, 대동(大同) 세계 등을 평생의 화두로 삼아 수많은 논저를 남겼다.

류 박사는 사학 분야에도 큰 족적을 남겼다. 특히 60년대 초부터 관심을 가지고 탐구해온 갑골학 연구와 광개토대왕비 등 금석학에 대한 연구 결과는 한국 사상의 원형을 밝히고 그 의의를 세계 학계에 알리는 데 지대한 공을 세웠다. 류 박사는 특히 한국에서 발견되지 않았던 백제 왕인 박사에 대한 문헌을 발견했으며 광개토대왕비에 대한 일본·중국·서구 학자들의 오류와 위조를 밝혀냈다. 류 박사는 또한 실학파·서학파의 사상적 배경이 된 한국 양명학파의 실체를 최초로 연구해 발표했다. 행정자치부에서 발표한 『태극기 해설』의 초고를 작성한 것도 그다.

류 박사의 저서로는 『도원철학산고』『한국 사상의 연원과 역사적 전망』『유가철학과 동방사상』『한국유학사』『동양철학연구』 등이 있다. 그의 저술은 중국에서 번역 출간되기도 했다. 유학·철학 분야 공적을 인정받아 국민훈장 목련장과 유학학술문화대상을 받은 그는 지금도 서울 종로구 내수동에 있는 연구실에서 21세기를 지도할 수 있는 사상을 도출하기 위해 진력하고 있다. 23일 류승국 박사를 연구실에서 만났다. 다음은 인터뷰 요지.

-중국에서 공자가 부활하고 있습니다. 공자 부활의 의의는 무엇입니까.
“나를 포함해 많은 학자가 유교를 비롯한 동양의 사상과 철학이 서양 계몽주의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는 것을 밝혀냈습니다. 4000년 전에 나온 서경 등 경서 속에 서구식 민주주의보다 앞선 사상이 들어 있습니다. 백성이 나라의 근본이라는 깨달음이 있습니다. 시카고대학의 H G 크릴 교수는 『유교와 서구민주주의』라는 저서에서 제퍼슨의 독립선언의 정신이 공자의 철학사상에 영향을 받았음을 논증했습니다. 오늘날에도 종교와 과학, 종교와 종교, 종교와 이데올로기, 종교와 경제의 갈등을 해소하고 조화시킬 수 있는 성숙한 인간과 성숙한 사회를 만드는 데 공자의 인도주의 사상이 기여할 수 있습니다.”

-유교의 정치적 원리는 어떤 것입니까.
“유교사상에서 정치의 3대 원리는 정덕(正德)·이용(利用)·후생(厚生)입니다. 이용은 물질이 풍요해 생활하는 데 부족함이 없는 것입니다. 후생은 인간의 생체(生體)와 생명을 보호하고 정치적으로 인격을 존중히 여기며 사회적으로 보장하는 민주화된 사회복지제도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근대화의 목표는 경제적 풍요, 정치적·사회적 민주화, 사회복지 제도의 원만한 수립이었습니다. 선진국형의 이상입니다. 그러나 후기산업사회에 내재된 여러 문제와 모순들은 동양에서 말한 인간 관리인 정덕을 갖지 않는다면 해결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이것은 동양인의 지혜인 동시에 우리 인류의 이상입니다.”

-유교가 세계에 제시할 비전은 무엇입니까.
“한국·중국·일본·베트남 등 한문을 사용하는 동아시아 문화권은 예로부터 공자가 말한 ‘대동(大同)사회’를 바람직한 이상적 사회로 추구하고 있습니다.”

-대동사회는 어떻게 도래할 수 있습니까.
“대동사회의 이상은 인간 개개인이 모두 대도(大道)를 알아서 행동할 때 가능합니다.”

마땅한 길·생명·진리가 대도(大道)
-대도란 무엇입니까.
“대도란 생명이며 진리이며, 사람들이 마땅히 행해야 할 길입니다.”

-한국사상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한국사상은 한국을 주체로 한 사상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국사상의 고유성과 외래성을 문제 삼게 되는데 외래적 요소를 배제하고 한국 고유의 사상만을 가려내어 한국사상을 정립하려 하는 것은 편협한 견해입니다. 외래사상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다시금 피어날 때에는 한국적인 특성과 문화적 개성으로 재창조되기 때문입니다.

한국사상의 특징을 구조적으로 관찰하면 같은 사고 유형을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시대와 상황이 아무리 바뀌었다 할지라도 본질적인 원형은 변하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 건국설화를 보면 단군은 하늘을 상징하는 환웅과 땅을 상징하는 웅녀 사이에서 탄생했다는 기술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한국 사상은 신인합일(神人合一)의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신본주의(神本主義)나 인본주의(人本主義)가 아니라 신인합일입니다.

우리는 역사적으로 천지인(天地人) 삼재 중에서 천지의 요소를 인간에게로 집약해 인도주의 정신을 역사적으로 고취해 왔습니다. 우리는 하늘도 소중하고 땅도 소중하지만 인간은 더욱 소중히 여기는 특징을 가진 것입니다. 바로 이 점이 군자국(君子國)인 우리의 전통입니다.”

-건국설화에 나오는 천부인은 무엇입니까.
“환웅이 아버지 환인으로부터 천부인(天符印) 3개를 가지고 와서 이것으로 통치의 기준을 삼았다고 합니다. 인간의 양식과 이성과 본성으로 기준을 삼아 통치하는 것이 천부인입니다. 권력이나 군대의 힘이나 형식적인 법률 등으로 나라를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성질과 꼭 맞는 인간 속에 내재한 천성에 맞도록 통치하라고 한 것입니다.”

-한국의 이러한 인간 중시 전통은 앞으로 어떤 힘을 발휘할 수 있습니까.
“종교와 과학의 간격을 메울 수 있습니다. 중세기가 종교를 중시하는 ‘천(天)’ 중심의 사회였다면, 현대는 물질과 학을 중시하는 ‘지(地)’ 중심의 사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은 종교와 과학은 있지만 인간은 없습니다. 그야말로 인간 소회의 시대입니다. 그러나 종교나 과학이 아무리 숭고하고 위대하더라도 인간의 생명을 도외시하고는 진정한 의미가 없습니다. 종교의 인간화, 과학의 인간화가 이뤄질 때 이상사회, 대동사회가 될 것으로 믿습니다.”

천성에 맞는 통치가 우리 전통
-한국 유학은 어떻게 나아가야 합니까.
“지금까지 유학사상은 ‘억음존양(抑陰尊陽)’이라 하여 전근대적 신분사회의 논리를 뒷받침한 측면이 있었다면 현대의 유학사상은 조양율음(調陽律陰)의 조화 원리로 개개인의 독립과 성숙을 전제로 한 인간 완성과 세계 완성을 추구하여 홍익인간의 이상을 실현하는 방향으로 추진돼야 합니다. 인도를 구현함으로써 군자국의 진면목을 드러내는 것이 한국 유학사상의 바람직한 방향입니다.”

-모든 종교에는 학문적인 성격도 있습니다. 학문은 무엇입니까.
“학문이란 궁극적으로 자기 성숙이요, 진정으로 자기 자신이 되는 것입니다. 참된 나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공자도 참된 의미의 자아를 철학적으로 성찰해, 나아가서는 자기를 부정하고 희생하는 데까지 이르는 자아의 신장을 강조했습니다. 그러나 학문뿐만 아니라 수양이 필요합니다. 학문은 더하는 것이며 수양은 감하는 것입니다. 내 마음의 때를 벗겨내는 것입니다. 수양을 하지 않고 학문만 하는 것은 마치 더러운 그릇에 깨끗한 물건을 담는 것과 같습니다. 물건까지 더러워집니다.”

-종교는 미래에 어떻게 됩니까.
“종교를 중심으로 하는 가치관과 과학을 중심으로 하는 가치관은 하늘과 땅의 문제로 양극화한 현상을 빚어냅니다. 이 모순관계를 녹여내기 위해 종교와 과학이라는 양극을 매개하는 인간의 차원이 부각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모든 종교는 신(神)으로부터 인간에게로 그 방향을 바꾸어야 할 것입니다. ‘신(神)은 민(民)의 주(主)’라고 하겠지만 ‘민은 신의 주’라고 하는 사상도 알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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