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포털서 막으면 해외 포털로 '검색대 우회'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159호 22면

한글 소설의 효시로 알려진 허균의 『홍길동전』은 아버지를 ‘대감마님’이라고 불러야 하는 주인공의 기구한 운명을 담고 있다. 서얼을 차별하는 조선시대에 첩에게서 태어난 홍길동에게는 아버지와 형님이라는 호칭이 금지어였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세상이 달라졌다. 쓰지 못하게 하는 단어가 있으면 어떤 식으로든 장애물을 피해서 쓴다. 21세기 정보통신 수단인 인터넷에서도 마찬가지다. 인터넷 이용자가 금칙어를 회피하는 방법은 다양하다. ‘조건만남’이라는 금칙어에 대해서 ‘ㅈㅗㄱㅓㄴㅁㅏㄴㄴㅏㅁ’처럼 파자(破字)를 하거나 ‘조 건 만 남’으로 띄어 쓰고, ‘조♥건♡만₩남♨’같이 특수부호를 삽입하기도 한다. 이 방법도 막히면 아예 ‘ㅈㄱㅁㄴ’처럼 초성만을 쓰거나 텍스트를 이미지로 바꾸어 등록하는 기법까지 등장했다.

금지어 뚫고 막는 창과 방패의 대결

욕설의 경우는 ㅆㅂ, ㅄ, ㅈㄹ 등 초성을 쓰거나 신발, 십장생, 개나리 등 발음이 비슷한 다른 단어를 써 의미를 전달하는 방법이 쓰인다. 상스러운 표현은 소리 나는 대로 제기랄→줴기랄→젝일, 이런 젠장→이런 덴장→이런 된장과 같은 식으로 변형하는 방법이 동원된다.

인터넷에서 금칙어 필터링을 피하기 위해 아예 새로운 말을 만들어내는 경우도 있다. 네티즌 대화에서 자주 등장하는 ‘쀍(혹은 뷁)’의 경우가 그렇다. 이 말은 이른바 ‘폐인’들의 집합소인 DC인사이드라는 사이트에서 2003년 초반에 만들어진 신조어였다. 포괄적으로 부정적인 의미를 표현하거나 화가 났을 때 의성어로 쓰이면서 욕설을 대체하는 효과를 지닌다. 감탄사나 할 말이 없을 때도 사용되는 ‘쀍’은 조형적으로 독특하고, 이미지가 아닌 자판으로 구현이 가능한 데다 상황에 따라 다르게 쓰이는 적응성 덕분에 금지어 명부에 오르지 않고 살아남은 아이템이다.

해외검색서비스를 이용하는 것도 한 방편이다. 국내 주요 포털들이 불법·유해성이 우려되는 단어에 대해 검색 결과를 관리하고 있는데 이를 피하기 위한 대응인 셈이다. 국내 포털들은 ‘sex’같이 음란물 노출 위험이 높은 단어에 대해 결과 필터링 및 성인인증장치를 설정하고 있다. 마약·자살 등 유해정보 노출 위험이 높은 경우는 결과 필터링 및 검색 결과 상단에 긍정적 정보를 노출하는 등의 방식을 적용하고 있다. 이를 근본적으로 피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래서 네티즌들은 이런 관리를 하지 않는 구글·야후·빙 등 해외 검색 서비스를 이용하기도 한다.

이용자들은 또 서비스가 애플리케이션으로 구동되는 경우 검색제한 조치를 무력화할 수 있는 패치 파일을 만들어 사용한다. 게임의 경우는 이용자들끼리 금지어를 피해가는 방법에 대한 정보를 공유하거나 필터링 회피 프로그램을 만들어 배포하기도 한다.

필자도 금칙어와 관련된 일화를 갖고 있다. 백령도에 서식하는 물범 사진을 어느 커뮤니티 사이트에 올리려고 “어미 물범과 앙증맞은 새끼 물범이…”라는 문장을 입력하자 ‘새끼’라는 단어 때문에 등록이 안 돼 결국 ‘애기’ 물범으로 대체할 수밖에 없었던 황당한 사례였다. 필자가 배운 바로는 어린 짐승을 ‘새끼’로 부르는 것이 제대로 된 우리말 쓰임이고 오히려 짐승에게 ‘애기’와 같이 사람에게 쓰는 표현을 붙이는 것이 잘못된 용법으로 알고 있다. 인터넷에서는 할머니가 손자에게 “이쁜 내 새끼”라는 표현도 할 수 없으니 요즘 우스갯소리로 ‘내 새끼도 내 새끼라 부르지 못하는 세상’이 된 셈이다.

금지어 차단 시스템이라는 방패와 ‘검열’을 뚫는 다양한 창(槍)을 동원한 사업자와 이용자 사이의 보이지 않는 각축전이 순간순간 사이버 공간에서 벌어지고 있다. 홍길동이 겪었던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님을 형님이라 부르지 못하는 모순된 상황이 재연되고 있는 이유는 뭘까? 네트워크와 하드웨어는 앞서 있으나 소프트웨어와 콘텐트는 뒤져 있는 인터넷 문화의 파행 때문일 것이다.

세계는 지금 한 손엔 모바일, 또 한 손엔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를 들고 21세기 디지털 혁명의 고지를 선점하기 위해 뛰고 있다. 갈 길 바쁜 대한민국의 이용자들과 인터넷 기업의 발목을 붙잡고 체력과 자원을 낭비하는 전봇대이자 쇠말뚝인 금지어야말로 금칙해야 할 금지어가 아닐까?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