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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규웅의 문단 뒤안길-1970년대 <59>이문구의 ‘우리 동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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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호 10면

1977년 무렵의 이문구.

모윤숙을 새 회장으로 선출한 펜클럽 한국본부의 총회가 열리기 한 달 전인 1977년 1월 한국문인협회도 임원 개선을 위한 총회를 열었다. 73년 총회에서 김동리를 꺾은 조연현이 문덕수의 지지 세력까지 흡수해 4년 동안 문협 내에 단단한 아성을 구축하고 있었으므로 이렇다 할 변화의 조짐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문협의 정관은 이사장직의 세 차례 연임을 금하고 있었기 때문에 조연현은 나설 수 없었다. 그래서 73년, 75년 선거에서 조연현을 적극 밀었던 서정주가 대타로 나서 손쉽게 새 이사장이 되었다. 조연현은 한 달 뒤 문협 대신 펜클럽 회장 선거에 나섰다가 모윤숙에게 패하고, 79년과 81년 문협 총회에서 다시 이사장에 올랐으나 임기 중인 81년 11월 일본 여행 중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어쨌거나 문협에서는 김동리를 구심점으로 하는 반 조연현 세력의 설 자리가 없었으므로 문단은 평온했다. 특히 70년대 중반까지 줄곧 반 조연현의 선봉에 섰던 이문구는 펜클럽 선거에서 조연현을 꺾기 위한 모윤숙의 선거운동을 마지막으로 서서히 ‘문단정치’에 환멸을 느껴가고 있었다. 73년 선거에서는 스승 김동리의 선거운동 자금으로 쓰기 위해 아파트까지 팔았으나 실패했고, 75년 선거에서는 조연현에 맞서 출마한 이호철을 당선시키려 전력투구했으나 역시 역부족이었던 것이다. 그가 편집장을 맡았던 ‘한국문학’도 이근배에게 넘어가고, 다소 늦은 나이로 결혼도 한 처지여서 생활 안정이 무엇보다 시급했다.

막연하게나마 서울을 떠나 시골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던 중 우연히 만난 후배 작가 박광서로부터 발안이라는 곳에 관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박광서는 그 무렵 직장 일로 그곳에서 살고 있었다. 발안은 경기도 화성군 향남면에 속한 곳이다. 본래는 바다의 갯벌 안쪽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벌안’이라 불렸으나 유식한 사람들이 ‘발안(發安)’으로 고쳐 쓰기 시작하면서 그대로 굳어졌다고 한다. 박광서를 따라 발안을 둘러본 뒤 이문구는 그곳에 터를 잡기로 결심한다. 그렇게 해서 발안에 이사한 것이 77년 5월이었다.

이문구가 이사한 곳은 작은 부락으로 스물한 가구가 옹기종기 모여 살고 있었는데 모두가 3대 이상 살아온 토박이들이었다. 하지만 집집마다 전화·텔레비전·경운기·오토바이에다 소를 한두 마리씩 키우는, 그 무렵으로서는 부촌이었다. 이문구가 이사했을 때 마을 사람들은 한결같이 경계의 눈초리를 보냈다.

생김새나 행동으로 봐서는 자기네들과 별반 다를 것이 없는데 툭하면 서울 출입이 잦고 손님들이 끊이지 않는가 하면 어떤 날엔 뭘 하는지 하루 종일 방에 틀어박혀 있는 꼴이 도무지 수상쩍었기 때문이다. 이문구 내외는 마을 사람들과 동화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큰돈은 아니지만 급전을 빌려 달라 하면 두말 않고 빌려주었고 이따금 농사일을 돕기도 했으며 함께 어울려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그렇게 몇 달을 지내는 가운데 아문구는 그 마을에 정을 붙이기 시작한다. 그것은 그가 태어나고 성장한 고향(충남 대천)에 대한 애정과 다를 바 없는 정겨움이었다. 이문구는 그곳에서 살면서 체험하고 느낀 여러 가지 이야기들을 소설에 옮겨보기로 작심했다. 그것이 그의 고향 ‘관촌’의 이야기를 그린 『관촌수필』 연작에 이은 『우리 동네』 연작이다. 첫 작품인 ‘우리 동네 김씨’가 발표된 것이 이사한 지 반 년 만인 그해 11월이었다. 이 연작은 80년 서울로 다시 이사한 뒤에도 계속돼 81년에야 9편으로 마무리됐다. 이 작품은 노동 인력이 썰물처럼 빠져나가 차츰 활기를 잃고 피폐화되는 70년대 우리 농촌의 현실을 가장 실감 있게 그렸다는 평가를 받아 ‘한국문학 작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이문구가 발안에서 산 것은 겨우 3년 남짓하지만 그가 떠나려하자 마을 사람들 모두가 서운함을 감추지 않았다. ‘이문구가 없는 발안은 영 허전하고 심심해서 재미가 없다’는 것이었다. ‘꼭 다시 돌아오라’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 이문구가 발안에 사는 동안 기자도 여러 차례 찾아간 적이 있었지만 그곳 마을 사람들의 이문구에 대한 애정은 일관되게 진지하고 소박했다.

마을 사람들이 석별의 정으로 준 농산물만도 한 트럭에 달했다. 오죽하면 이문구가 이사한 지 10여 년이 지나도록 동네의 주민 명단에 ‘이문구’의 이름을 지우지 않고 돌아오기를 기다렸을까. 그것은 이문구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그에게 있어서 ‘우리 동네’란 소설 제목으로서의 ‘우리 동네’가 아니라 그의 마음속에 커다란 부분으로 자리 잡고 있는 보편적 의미의 ‘우리 동네’였던 것이다.


중앙일보 문화부장·논설위원 등을 역임했다. 문학 평론가로 추리소설도 여럿 냈다. 1960년대 문단 얘기를 다룬 산문집 『글동네에서 생긴 일』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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