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기근에 시달리던 아프리카 어린이처럼 뼈만 앙상한 어린이들, 핏자국이 화석처럼 굳어버린 1942년 체코산 수술침대, 마취제.링거액.소독약은 물론 씻을 물도 제대로 없는 치료실, 겨울철에는 영하로 내려가는 입원실… .
18일(현지시간) 낮 미 워싱턴의 국회의사당 옆 의원회관 레이번 빌딩 B-339호실. 북한에서 의료활동을 벌였던 독일인 의사 노르베르트 폴러첸(43.사진)이 평양 인근 병원의 모습이라며 틀어놓은 비디오가 돌아가자 실내엔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23일로 예정된 미 상원 북한문제 청문회의 예비모임으로 열린 '폴러첸 증언회' 에는 미 상원외교위와 행사를 주최한 연구단체 '디펜스포럼' 의 간부진, '탈북자인권후원회' 를 비롯한 재미교포 운동가들, 국회인권포럼의 김영진(金泳鎭).황우여(黃祐呂)의원, 김상철(金尙哲)변호사 등 탈북난민보호 유엔청원운동본부 관계자, 그리고 취재진 등 1백여명이 참석했다.
웃음도 울음도 잊은 피골상접(皮骨相接) 어린이들의 모습이 화면을 채우자 서울에서 온 청원운동본부의 조안 리(스타커뮤니케이션 대표)씨 등 몇몇 여성은 눈물을 훔쳐냈다.
폴러첸은 독일 민간봉사단체인 '카프 아나무르' 에 소속된 응급의료팀의 팀장으로 99년 7월 북한에 들어가 지난해 말 추방될 때까지 다섯곳의 병원과 두곳의 고아원을 담당하며 의료봉사를 펼쳤던 인물.
그는 화상환자를 위한 피부 기증 대열에 동참하는 등 헌신적인 노력으로 서방인으로서는 최초로 북한 당국의 친선 메달을 받았다.
그는 이를 신분증처럼 사용해 다른 서방인보다 자유롭게 북한의 여러 곳을 돌아다녔고 북한의 참상을 목격했다. 그는 지난해 10월 매들린 올브라이트 미 국무장관의 방북을 수행한 서방기자단의 일부를 북한의 이곳저곳에 안내한 행동으로 당국의 눈밖에 나기 시작했다.
그는 북한에서 나온 후 한국.일본.유럽.미국 등에서 북한의 인권 참상을 고발하는 일에 몰두해 왔는데 그의 증언이 곧 미 상원 청문회에 올려진다는 점에서 이날의 모임은 의미가 각별했다.
그는 "북한 간부들은 베이징(北京) 면세점에서 외국 유명브랜드를 사고 평양에서는 벤츠를 타고 다니는 등 호사스런 생활을 하는데 북한 주민들은 강압통치에 시달리고 제대로 먹지 못해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소진됐으며 탄압의 두려움에 사로잡혀 현 상황을 서로 얘기하지도 못하고 있다" 고 증언했다.
폴러첸은 "어린 소녀가 마취제도 없이 맹장염 수술을 받는 것을 보기도 했다" 며 "병원 당국이 '독극물 섭취' 라고 설명한 어린이의 병명이 사실은 극심한 영양실조였다" 고 말했다.
그는 "내가 본 병원에서는 링거병 대신 빈 맥주병, 메스 대신 면도날을 사용했다" 고 말했다. 그는 참상을 찍은 비디오 테이프를 동료의사의 부츠 속에 숨겨 북한 국경을 통과할 수 있었다.
미 상원 외교위(위원장 제시 헬름스)는 23일 폴러첸과 제임스 켈리 국무부 동아태 담당 차관보, 로버트 갈루치 전 제네바 핵회담 미국 대표 등 관리들이 출석한 가운데 북한문제 청문회를 개최한다.
워싱턴=김진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