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운영 칼럼] 굴뚝과 수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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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그는 1천2백원짜리 점심을 한 달에 20번쯤 학교에서 먹는다. 왼손에서 휴대전화가 떨어지는 법이 없는 그 학생은 월 5만원 정도의 요금을 내는데, 한 달 용돈은 20만원 남짓하단다. 기성 세대로서 나는 그의 '가계비' 지출 구조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중에도 가장 걸리는 것이 점심이었다.

그래서 어이 전화 줄이고 점심 좀 나은 거 먹으면 안돼 하고 말을 건넸더니 그는 멋쩍은 듯이 씨익 웃었다. 영양가가 한결 나아 보이는 교직원 식당의 점심은 1천8백원이었다.

*** 소득 불평등 문제점 야기

점심 값의 두 배가 넘는 전화료 지출을 놓고 우리 농업과 통신 산업의 현재를 견주며 한탄하려는 것이 아니다.

적잖은 가정에서 통신비 지출이 식비를 넘는 것이 현실임에도 그런 비교는 옳지 않다. 다만 이런 질문은 가능하리라. 우리가 먹고 살 주력 산업이 무엇이냐는 문제와 관련해 '굴뚝' 산업과 정보기술(IT)산업의 관계는 어떠해야 하는가? 한 걸음 더 나가면 오프라인 산업과 온라인 산업의 관계 정립이 될지 모르겠다.

배고픈 것이 무엇인지를 직접 배로(!) 체험한 우리 세대 대부분은 먹고 마시는 '동물적' 삶을 의사 소통의 '문화' 보다 앞세우지 않을 수 없다.

굶는다고 전화통을 씹어 먹을 수는 없으며, 허기진 배를 전화 통화로 채울 수는 없지 않은가. 물론 우리도 '배부른 돼지' 를 경멸할 줄 알고, 전화기를 팔아 고기를 수입하는 방법도 안다.

그러나 경제 계산은 결코 동물적이지 않다. 쌀이 전화보다 사람의 생존에 한층 더 중요할지라도, 쌀 생산의 '부가가치' 가 - 쉽게 말해 소득이 - 통신 서비스보다 적다면 경제는 단연 쌀 대신 전화기를 선택한다. 문제는 정보기술의 부가가치 생산 효과인데, 그것이 아직 확실하지 않다. 소득 향상보다는 오히려 소득 불평등의 원흉이라는 원성이 높다.

그렇다면 길은 뜻밖에 가까운 데 있을지 모른다. 그 하나는 부가가치 생산이 확실한 쪽으로 눈을 돌리는 방법인데, 한마디로 'IT 산업의 굴뚝화' 가 그것이다.

이를테면 가입자 확보 경쟁보다는 연구개발(R&D)과 인프라 확장에 주력함으로써 전래의 굴뚝 못지 않게 고용을 증대하고 소득을 창출하는 것이다. 일례로 황금 알을 낳는다는 휴대 전화기의 부품 국산화 비율이 55%에 불과한 실정이라니, 굴뚝 보호 애국심(?)이 굴뚝같이 절실하다.

다른 하나는 소득 불평등을 해외로 '내보내는' 방법이다. 밖으로 드러내고 할 말은 아니나 어차피 피하기 어려운 현실이라면 국내의 계층간 불평등보다는 국가간 불평등이 그래도 낫지 않겠는가? 세계의 소득 총액에서 교역 가능한 부분은 대체로 일정할 텐데 그것을 누가 많이 차지하느냐는 싸움이 곧 수출 전쟁이다.

다행히도 정보 통신은 상대적으로 일찍 눈을 돌린 덕으로 우리가 제법 '비교 우위' 를 갖춘 분야다. 차세대 통신이 한바탕 국내 시장을 뒤흔들겠지만, 그것도 '현세대' 통신처럼 미구에 수요가 바닥날 것이다.

사정이 그렇다면 단연 세계 시장을 향해야 하고, 여기서 'IT 산업의 수출 특화' 가 요긴해진다. 세계의 빈부 격차를 걱정할 만큼 느긋하지 못한 형편에서 반주변부(semi-periphery)의 우리 경제가 취할 선택은 이것이 최선이렷다.

*** IT를 팔되 굴뚝도 보존

이런 정도의 상식을 기업이나 정부가 모를 리 없다. 문제는 그 상식에 숨은 허점으로서, 예컨대 정보기술을 비롯한 '신산업' 은 신주처럼 모시고, 전통적인 굴뚝 산업은 서자로 내치려는 시대의 유행 말이다.

날씬한 통신 기기와 날렵한 통신 서비스의 해외 수주가 우리 경제에 미치는 결정적 중요성을 모르는 바 아니나, 굴뚝을 통한 섬유 수출이 지난해 무역 흑자 1백66억달러 가운데 1백37억달러로 1위를 차지했다는 사실도 잊어서는 안된다.

행여나 신산업 육성에 묻혀 굴뚝이 막힌다면 그런 불행이 없으며, 나는 이런 걱정이 정말 기우(杞憂)이기를 바란다.

충남 아산의 외암리 민속 마을에는 툇마루 밑으로 굴뚝을 낸 집이 있다. 주인의 설명으로는 그것이 고려 적 굴뚝 형태로서 방을 데우는 데는 지붕 위의 굴뚝보다 한결 효과적이란다.

하얀 - 완전히 타서 불날 걱정이 없는 - 연기가 연못과 정원을 덮었다가 하늘로 피어오르는 광경은 정말 일품이었다. 그래 IT를 요령껏 팔아먹되 말뚝 같은 뚝심으로 굴뚝 지키기, 이것이 한국 경제에 보내는 나의 첫 번째 고언이다.

정운영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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