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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사자다!" 사랑 전하는 동화구연 아버지회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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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6면

"사자가 '산속의 왕은 나다' 라고 크게 소리치자 샘물이 '산속의 왕은 나다' 라고 따라서 소리쳤습니다. "

"화가 난 사자가 더 큰 소리로 '아니다, 산속의 왕은 나다' 고 소리치자 이번엔 숲속에서 사자의 말과 똑같은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

지난 12일 오후 서울 사직동 어린이도서관 시청각실. 엄마.아빠와 함께 동화를 듣고 있는 어린이들로 시청각실은 발디딜 틈이 없었다.

이 행사는 '동화구연 아버지회' 회원들이 마련한 무료 공연. 아이들은 간호사.군인.할아버지.할머니로 분장하고 무대에 선 아버지들의 모습에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동화구연 아버지회의 공연은 이번이 67회째. 1992년 이후 전국의 보육원.양로원 등을 돌며 무료 공연을 해왔다. 크리스마스 땐 산타 복장을 하고 보육원 아이들을 찾아간다. 하지만 백화점 등에서 돈을 주고 하는 공연은 사절.

진짜로 이들의 손길이 필요한 곳이 아니면 아무리 좋은 조건의 공연도 거절한다. 아버지회를 구성하는 사람들은 생업을 따로 갖고 있는 일반 직장인들이다. 교사.택시 기사.농부.회사원 등 다양하다.

직장 생활에 바쁜 아버지들이라 오후 9시쯤에야 모여 연습을 시작한다. 연습을 하다 보면 오전 2~3시가 넘는 건 예사. 돈을 받는 공연도 아니고, 직장일에 바쁜 아버지들이 왜 이런 일을 하는 걸까.

"민통선 안에서 밭을 일구는 제 경우엔 통금을 놓쳐 집에 가지 못하는 날도 많죠. 하지만 무대에 올라 아이들의 맑은 눈동자를 볼 때면 정말 보람을 느낀다" 는 서정환(55)씨.

이들에겐 기뻐하는 아이들의 얼굴이 퇴근 후 피곤함을 잊게 하는 힘이다. 동화구연아버지회의 결성은 91년 제1회 전국동화구연아버지대회로 거슬러 올라간다. 대회 입상자들 중에 "이왕 끼 있는 아버지들이 모였으니 함께 보람있는 일을 해보자" 고 의기투합한 사람들이 모여 무료 공연에 나섰다.

지난해부터는 어린이동화구연대회에서 1등을 한 이승아(11.중대부속초등 4)양이 아버지 공연에 함께 해 더욱 활기를 띠고 있다.

"언젠가 소아암 병동을 찾았을 때였습니다. 창백한 얼굴의 아이들이 링거를 꼽고 누워 있는 복도에서 공연을 하는데 눈물이 나오더군요.

무표정했던 아이들이 공연이 끝날 쯤엔 아이다운 얼굴로 웃음을 터뜨리는 것을 보고 이 일을 계속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 서울고등학교 수학 교사인 회원 조영종(41)씨의 말이다.

동화구연 아버지회 회장 편사범(48)씨는 "바쁜 아빠들은 1~2분이라도 할애해 아이들에게 동화를 들려줌으로써 컴퓨터와 게임에 중독돼 고립돼 가는 아이들과 대화의 기회로 삼으라" 고 덧붙였다.

박혜민 기자

사진=박종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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