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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학교에서 청강한 세 여성, 최초로 여의사 자격 취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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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안수경·김해지·김영흥 세 청강생의 1918년 경성의학전문학교 졸업 기념사진. 군복을 입고 칼을 찬 교수들의 복장은 순사와 전혀 구별되지 않는다. 검은 제복의 남자들 뒤에 흰 옷을 입고 선 세 여성이 본격적인 ‘여의사’ 시대를 연 선구자들이다. (사진 출처=『조선의육사』)

우리나라에서 제작된 마지막 무성 영화는 1948년의 ‘검사와 여선생’이다. 영화사적 가치는 무척 높은 작품이지만 이 제목에 심기가 불편한 사람도 적지 않을 것이다. ‘검사와 교사’라 하든지 굳이 성별을 표시하고 싶다면 ‘남검사와 여선생’으로 하면 되었을 것을. 직업명에서 성 구분을 걷어내자는 수십 년에 걸친 계몽에도 불구하고 최근 화제가 된 연극 ‘교수와 여제자’에서 보이듯 이런 표현 방식은 아직껏 지속되고 있다.

우리말에는 성(性)을 구분하는 인칭대명사가 없다. 영어의 She에 해당하는 ‘그녀’라는 말이 ‘발명’된 것이 고작 수십 년 전이다. 그래서 스튜어디스나 웨이트리스처럼 ‘성’ 표지가 붙어 있는 영어 단어를 번역할 때에는 대개 그 앞에 ‘여(女)’ 자를 붙였다. 그렇다고 모든 여성 직업을 그렇게 표현하지는 않았다. 성별 분업이 시작된 이래 여성의 일이 남성보다 적었던 적은 거의 없지만, 그 일들은 어미·며느리·아내라는 호칭에 따라붙는 일이었지 독립된 직업은 아니었다. 조선시대에 의녀·침선비·무수리·기생 등 따로 보수를 받거나 남의 집 일을 하는 여성들은 모두 ‘사람 취급’을 받지 못했다.

20세기에 접어들 무렵에야 집 밖에서 일하는 ‘양가(良家) 부녀’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그때부터 여성 직업은 두 부류로 나뉘었다. 하나는 침모·간호부·산파처럼 직업명 자체에 ‘성’ 표지가 붙은 것이고, 다른 하나는 여교사·여의사·여기자처럼 직업명 앞에 ‘여’자를 덧붙인 것이다. 여교수는 ‘커리어우먼’, 접대부는 ‘직업여성’으로 구별하는 관행은 오늘날까지도 일소되지 않았다.

1918년 3월 26일 경성의학전문학교 제2회 졸업식에서 안수경·김해지·김영흥 3명의 ‘청강생’이 졸업 증서를 받고 의사 자격을 얻었다. 이 땅에서 교육받은 최초의 ‘여의사’ 3인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이후에도 이 땅에서 여의사가 되기는 무척 어려웠다. 경성여자의학강습소가 문을 연 것은 1928년이었고, 졸업과 동시에 의사 면허를 주는 여자의학전문학교는 그로부터 다시 10년이 지나서야 개교했다.

우리나라 양성 평등 지수가 몇 년째 제자리걸음이라고는 하지만 역사적 시간대에서 보자면 최근 한 세대 동안의 변화 속도는 광속(光速)에 가까웠다. 교사의 과반을 여성이 점한 지는 이미 오래고 지금은 의사시험이나 사법고시 합격자의 반 수 이상이 여성이다. 머지않아 ‘검사와 남선생’이라는 제목이 오히려 익숙한 시대가 올 터, ‘여성의 임무는 가정을 기반으로 해야 한다’는 생각이 발 디딜 공간도 조만간 사라질 것이다.

전우용 서울대병원 병원역사문화센터 연구교수